우주
우주가 어떤 식으로든 그 우주에 소속된 존재에게 영향을 끼친다면-
어느 한 존재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우주는 그 존재에게 있어서는 우주라고 말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편의점은, 특히 새벽의 편의점은 종종 편의점을 방문하는 손님에게 단 하나의 우주가 된다.
음료 진열대
편의점의 여름 매출 대부분은 차갑게 냉각되어 있는 상태로 판매되는 음료들에게서 나온다. 땀에 흠뻑 젖은 옷차림으로 뛰어들어온 손님들은 곧바로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냉장고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무엇을 마실지 결정하지도 않았으면서도 일단 유리문을 열어젖히고 본다. 캔에 담긴, 유리병에 담긴, 파우치에 담긴, 플라스틱 통에 담긴 음료들이, X, Y, Z 축으로 도열해 선택받기를 기다린다.
당신이 편의점에서 알바를 해 본 적이 없다면, 그리고 나처럼 줄 맞춰 서 있는 음료 너머의 공허에 가까운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두 눈과 마주치는 경험을 해 본 적도 없다면, 당신은 음료가 진열되어 있는 냉장고가, 사실은 언제나 눈보라가 몰아치는 영원한 겨울의 나라와 당신이 살고 있는 세계 사이의 국경선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진열대 너머에는 아직 박스에 담겨있는 음료들이 층층이 쌓여있고, 알바생들은 종종 빈 진열대에 음료를 채우기 위해 그 커다란 냉장고 안에서 이가 덜덜 떨리는 한기를 견뎌내야 한다. 그러나 그게 다일까? 그곳에 보관되고 있는 것들이 전부 음료일까? 다른 것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굳이 넷플릭스의 미드에 나올 법한 시체 유기 같은 것까지는 아니더라도(하지만 아닐 이유는 또 무엇인가!),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예를 들면 어릴 때 북극에서 조난되어 홀로 10년을 견디며 살다 보니 추위에 신체의 기전이 적응해 버리는 바람에, 기온이 10도 이상인 곳에서는 생존할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이 편의점 사장과의 딜을 통해 그곳에 자신만의 아늑한 거주지를 마련했을 수도 있다.
이런 상상이 일견 뜬금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음에 편의점을 방문하게 된다면, 음료 진열대 앞에 서서 한번 잘 살펴보기 바란다. 도열해 있는 음료들이 아니라, 캔과 캔, 병과 병, 팩과 팩 사이, 진열대의 하얀 LED 조명의 계몽주의적인 빛이 미처 도달하지 못하는 어두운 공간을. 컴프레셔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알루미늄 캔의 겉면에 맺힌 이슬이 흘러내리고, 어둠 너머에는 무엇인가가 보이는 듯 하지만, 당신은 그 너머의 공간이 어떤 크기이고, 어떤 모습이고, 무엇이 있는지 도통 짐작할 수 없다. 갑자기 번뜩이는 눈 두 개가 비어있는 칸 너머의 암흑에서 나타나고- 놀란 당신에게 말한다. ”닥터페퍼 금방 넣어드릴게요”
당신은, 당신이 무슨 음료를 먹고 싶었었는지와는 상관없이- 방금 채워진 닥터 페퍼 한 캔을 들고 계산대에 선다. 당신은 음료 진열대와 그 주변을 둘러보며, 안쪽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 따위가 있는지를 찾아보지만, 그런 것은 없다
창백한 조명
마르크스가 예상했던 공산주의 혁명은 오지 않았고, 공기 중에 날아다니는 먼지 입자 하나라도 이익을 얻기 위한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는 후기자본주의는 편의점의 조명을 고르는 데에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식이다: 편의점의 눈을 찌를 듯이 새하얀 조명은 빈사 상태의 몸을 이끌고 새벽의 편의점에 도착한 가련한 영혼을 실제보다 더 볼품없게 만든다. 유리창에 비친 혈색이 없는 얼굴에는 다크서클과 잡티만이 가득하다. 진열대 위에 놓인 물건을 집어드는 손은 좀비의 그것처럼 푸르딩딩하다. 세상에! 누가 봐도 죽기 직전의 몰골이잖아? 어떻게 하지? 자랑할 만한 성취도 기억할 만한 순간도 하나 없이 비루한 인생이더라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바로 그때, 계산대 앞에는 비타민과 영양제, 홍삼 스틱들이 그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만약 손님이 올라타있는 챗바퀴가 자기 착취와 자기 돌보기 사이에서의 균형에서 이탈하여 한쪽으로 위험하게 치우쳐져 있다면, 그 손님을 위해서는 다른 상품들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 당장 좁은 원룸방의 침대로 발도 닦지 않고 기어들어가 잠을 청해도 겨우 3시간밖에 자지 못하는 상황에서 손님은 진열대 위에 놓인 커피나 에너지 드링크와 눈이 마주친다. 이 친구들에게 따뜻한 색의 조명은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흠과 모든 주름, 모든 실수와 모든 후회들, 급기야는 그림자들까지 새파랗게 밝혀주는 조명 아래서 이 금단의 음료들은 자신의 후광을 얻는다. 너를 괴롭히는 말들, 사람들, 기대와 성과지표들, 시스템들, 세계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과 맞서다 부서지는 것뿐이지. 그러니까 나를 마셔- 밤샘 작업 때 커피나 에너지 드링크를 들이켜는 선택이 자기 파괴의 비밀스러운 기쁨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기 파괴는 따뜻한 조명보다는 차가운 조명 밑에서 더 비극적인 아우라를 가지게 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리
편의점에 있는 몇 개의 자리, 그러니까 작은 테이블과, 그에 어울리는 단출한 의자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시간대마다 달라진다. 아침에는 출근하기 전 가볍게 요기를 하는 직장인들이, 밤에는 늦게까지 독서실이나 스터디카페에서 공부했던 고등학생이나 야간 알바를 뛰고 온 청년들이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주로 이어폰을 꽂고 유튜브를 보면서 밥을 먹는다. 편의점은 자의든 타의든 개인주의자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오는 곳이고, 그래서 보통 조용하고 따분하다.
오후 세시쯤이 되면, 편의점의 자리는 주황색과 검은색으로 등번호와 이름이 쓰인 흰색 유니폼을 입은 중학교 야구부원들 차지가 된다. 모두 빡빡이 머리를 하고, 마호가니 원목 가구처럼 검붉은 색의 피부를 가졌으며, 한시도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 컵라면을 먹으면서 말이다. 라면을 먹으면서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니, 잘 상상이 되지 않을 여러분들을 위해 조금 더 묘사를 해보자. 우선 이 아이들은 한 테이블에 적정 정원 이상으로 모여있다. 다시 말하자면, 의자보다 한 두 명이 더 많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서서 먹거나, 아니면 작은 의자를 반씩 나누어 겨우 엉덩이 한쪽씩 올려놓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어가며 먹는데, 그 불편함이 온전히 누구 한 명의 몫이 되지 않도록, 중간중간에 자리를 바꾼다. 그뿐만이 아니다. 먹다가 어깨동무를 하기도 하고, 다섯 명이 함께 누군가의 스마트폰을 바라보다가, 금방 또 다른 사람의 스마트폰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가위바위보를 하다가, 갑자기 서로 장난스럽게 때려대기도 하다가, 말도 없이 다른 사람의 라면 국물을 뺏어먹기도 하다가, 하나도 나오지 않은 배를 매만지며 “아 배 부르다”따위의 말을 하다가, 누군가가 “디저트 콜?”이라고 말하면 다시 우르르 과자코너로 몰려간다.
늦은 저녁에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라면을 먹는 고등학생들은 벌써 폭삭 늙어버린 것만 같다. 언제나 혼자 오고, 말없이 조용하며, 폰의 스크린 너머를 바라보는 일도 없다. 나무젓가락으로 라면의 면발을 잡아 올릴 때에도 시선은 움직이지 않는다. 젓가락을 쥔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만으로 자신이 지금 적당한 양의 면발을 잡았는지 아닌지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의 화면에서는 언제나 영상이 흐른다. 이지영의 사회탐구 인강이거나 침착맨과 궤도의 합방이거나 하는데, 본질적으로는 똑같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길면 3년, 짧으면 1년.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이 되기까지의 그 기간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새벽에 누가 편의점의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한량들, 백수들, 취준생들, 올빼미들, 일찍 일어날 자신이 없어 밤 새 깨어있기로 작정한 심약한 사람들, 과제 마감을 앞둔 디자인과 학생들, 야간 근무를 하는 사람들, 해결사들, 사립탐정들, 르포타주 작가, 일반 사람들의 삶과 편의점 음식이 궁금하여 몰래 한남동 집을 빠져나온 재벌 3세, 음악을 하거나 랩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쓰거나, 혹은 그러고 싶다거나, 혹은 그러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유로운 영혼들… 나는 그 모두와 멀어진 삶을 살고 있고, 매일 아침 아홉 시까지 출근을 해야 한다.
쓰고 싶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쓰지 못한 내용들
담배, 콘돔, 숙취해소제, 따분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한국어가 서툰 중국인 알바생, 유통기한이 임박한 상품, 단백질 드링크, 속옷과 양말과 스타킹, 입을 막고 묶어놓는데 유용한 청테이프, 알바생들은 어떻게 요의를 해결하는가에 대한 문제, 김치말이국수까지 나와버린 즉석섭취식품의 미래에 대한 공상, 맥주 할인을 받기 위한 경우의 수 계산하기(난이도 하), 아이스크림 할인을 받기 위한 경우의 수 계산하기(난이도 상), 그 외 이 정신분열적인 글을 적절한 방식으로 끝맺기 위한, 다소 시적이면서도 적당히 건조한, 공들여 고쳐 쓰지 않고 생각 가는 대로 한 번에 적어 내린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멋지고 무엇인가가 전달되는 것만 같은 마지막 문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