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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Jan 04. 2022

외로움의 역할

<오늘보다 더 사랑할 수 없는> 수록글


그는 함께여도 외롭다고 말했다. 웬 드라마에서 들었던 대사를 실제로 누군가 나에게 할 줄은 몰랐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나와 소주를 세 병 째 나눠 마시던 선배는 12년 만에 처음으로 연애를 쉬고 있다고 했다. “능력도 좋다.” 능청스레 대꾸하자 “나한테 먼저 좋다던 여자는 없었어.” 민망한 눈치로 답한다. 충분히 괜찮은 그가 변명하듯 대꾸하는 말을 들으며 냉소적인 사람들은 어쩌면 칭찬받는 게 부끄러워서 바보 같은 답을 하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일 년 반쯤….” 말 끝을 흐렸다. 학교를 다니며 캠퍼스 커플만 몇 번씩 하던 사람이었다. 학교를 오래 다닌 그보다 한참 늦게 입학한 내가 본 것만 두 차례니까. 본인 입으로는 여섯 번쯤 했을 거 란다. 다시 연애할 생각 없느냐는 나의 말에 그는 혼자서 지내는 게 어렵지는 않다고 차분하게 말했다. 이어 오히려 외로워서 연애를 멈추게 된 것 같다고 입을 떼곤, 자기랑 만나는 사람한테 미안할 것 같다고 했다.


“아아, 그치. 같이 있어도 외로우면 같이 있는 게 힘들지. 혼자일 때보다 더.” 나는 혼잣말하듯 답했다. 눈앞에 선배는 사라지고 지난 기억이 깜박인다. 그 감정의 매 순간순간이 침대 맡에 걸어둔 그림처럼 선명하다. 날카로운 기억은 잘 잊히지 않는다. 상처는 자국이 남아서 만질 때마다 환상통이 느껴진다. 언젠가부터 연애의 끝은 늘 외로움이었다. 외롭다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말을 하는 순간 나는 더 외로워질 테니까. 이미 외로움을 나눌 사이가 아니게 되어서, 감정을 채워달라고 요구할수록 나는 발가벗은 것 마냥 차가움에 벌벌 떨게 될 테니까. 연애의 마지막을 반복할수록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된다. 그들도 외로웠을까. 함께 있어도 외로워져서 겁이 나서 차라리 아무 말도 않게 된 걸까 우리는.


“외로움이 제 역할을 하는 날이 오겠지. 선배한테도.”



(2021.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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