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낫프로
회사를 그만 두면 그냥 팽팽 놀 줄 알았어요. 아무것도 안 하면서 멍하니 보내는 하루들로 채우는 짜릿한 시간을 꿈꿨죠. 프리랜서는 저 멀리 있는 일의 형태라고 생각했어요. 이름 만드는 거 어따 써먹어 브랜드 만드는 일 너무 쉬워졌잖아 라며 회사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써먹을 데 없는 능력이라고 판단했어요. 그냥마냥 할 것도 없을 텐데 놀아야지, 뭐하면서 놀지 궁리했어요.
열심히 놀 거니까 데이터 정리도 안 하고, 포트폴리오 수정도 내버려 뒀어요. 1년 전 이직하려고 준비해둔 파일 그 정도에서 제 일의 결과는 멈춰있었죠. 가끔 만나는 동료(였던) 디자이너 친구들이 프리랜서로 일한다고 하면 멋지다 잘 됐으면 좋겠다 응원했어요. 프리랜서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가진 업의 형태였으니까요.
여기저기 퇴사했다고 떠들고, 썰을 풀고, 이거 하면서 놀 거야 저거 해볼 거야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어엇?! 가끔이지만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같은 회사에서 일했던 동료 소개로,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이, 친구의 친구가 하면서 조금씩이요. 일을 같이 해보자는 분도 있었고요.
처음에는 “노는 게 제일 좋아요. 패스!” 했는데 아깝더라고요. 조금만 일하면 생활비는 벌 수 있을 텐데, 시간 대비 보수가 좋잖아 생각이 들었어요. 고민하고 있으니까 옆에서 친구는 말했죠.
“아름아, 벌 수 있을 때 벌어 놔. 그래야 한 달 놀 거 두 달 놀고 세 달 놀 수 있어.”
노는 게 삼 개월쯤 지나가니 슬슬 재미없기도 했고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일을 수락했죠. 같이 일했던 디렉터님 소개였고 일을 주시는 분도 전에 이 회사를 다녔던 터라 포트폴리오 검토 없이 운 좋게 일을 시작했어요. 네이밍만 하는 작업이라 그나마 수월하다고 생각했고요. 이름 짓는 분야가 생소해서 걱정했지만 언제는 알았나 싶어서 자료를 받고 크리에이션을 시작했죠.
제안할 네임의 양도 정해져 있었고 금방 하겠거니 속단했는데 아뿔사였어요. 왜 사람들이 회사에 모여 팀으로 일을 하는지 알 수 있었죠. 내가 없는 부분은 네가 채우고, 네가 없는 부분은 내가 채우고 시너지 집단으로 일하다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게 프리랜서였어요. 피드백 줄 사람도 없죠. 처음 하는 일이라 부담스러운데 내가 팀장, 매니저, 팀원도 하는, 그야말로 멀티여야 할 수 있는 게 프리랜서였어요.
그 사이에 바쁜 일이 생겨 일할 시간도 줄었어요. 하지만 이건 다 핑계. 시간관리도 프리랜서의 일. 마감은 정해져 있고 약속은 약속. 처음 하는데 잘해야죠. 이번 일만 잘하면 내년 프리랜서 농사를 위한 씨까지 뿌릴 수 있으니 밤을 새워서라도 해내야죠. 결과가 나를 증명할 것이다, 프리의 세계는 냉정하다 결연하게 마음을 다 잡았달까요?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며 연필로 사각사각 발상을 하고 같거나 비슷한 이름이 없는지 프로그램 돌려 검색하다 저 결국 밤샜어요.
아, 한아름 미리미리 하지, 프리여도 이러면 어쩔래 과거의 나를 원망했는데 밤새는 게 은근히 재밌었어요. 오랜만에 머리를 굴리니까 신났어요. 후보 안 다양성을 위해 생각의 폭을 넓히고, 영어만 잔뜩이니까 한글 이름도, 숫자를 활용한 네임도 넣어볼까, 정해진 디렉션에 맞춰 테트리스하듯 만든 네임을 배치해보고 이 밤이 나를 도와 마감의 기적을 만들어주는 것 같았어요. 졸리고 쫄리는데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막 들었어요. 새벽 다섯 시 반쯤 침대에 폭 쓰러졌어요. 한 시간 반 뒤 알람을 맞추고요.
다시 일어나서는 전쟁이었죠. 개발한 안을 정리하고 파워포인트에 앉혔어요. 이 이름은 어떤 의도로 개발했는지, 뜻은 무엇인지,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설명을 썼어요. 아무래도 파일로만 일의 결과가 오고 가다 보니 최대한 해석의 오류가 없었으면 했죠. 11시가 다가오고 땡땡땡! 정각이 조금 지나서 메일을 보냈어요. 두근두근했어요. 제발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내가 만든 이름으로 결정됐으면 바라고 담당자님에게 연락하고 침대로 픽 고꾸라졌어요.
새로운 일의 형태를 경험하니 같이 일했던 동료들의 얼굴이 지나갔어요. 일하면서 비슷한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생각보다 힘이 되는구나, 프리랜서와 회사원의 일은 비슷한 듯 다르구나, 혼자 다 하다니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까, 가끔 이렇게 일하는 건 재밌겠는데, 앞으로도 프리로 일할 수 있으려나, 온갖 생각을 하며 잠이 스르륵 들었죠.
보고일이 한참 지나도 담당자분 연락을 못 받아서 2차 개발을 염두했어요. 예상 일정보다 한참 지나서 전화를 받았죠. 결과는 담당자 분도 프로젝트 클라이언트도 만족! 제가 좋아했던 안과 클라이언트 선호 안에 차이가 있었지만 결정돼서 다행이었어요. 혼자 한 일이라 성취감이 회사 소속일 때보다 더 있었어요. 이 맛에 프리랜서 하는 건가 어렴풋이 생각했죠.
앞으로도 프리랜서로 일하고 싶어요. 프리의 양면, 알고 있어요. 자유롭게 일하려다 아무 일도 없이 그냥마냥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게 프리랜서겠죠. 회사가 품어주는 따뜻함 없이 정글 같은 바깥에서 혈혈단신 오롯이 일을 맞이 하는 게 프리랜서겠죠. 혼자는 힘들겠죠. 그래도 지금은 긍정적인 면을 보고 싶어요. 혼자라서 더 뿌듯할 수 있고 생각지도 못한 팀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게 프리랜서겠죠. 회사 소속일 때보다 보수가 조금 더 높은 게 프리랜서겠죠.
혼자 일하지만 결국 일을 주는 분들은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더라고요.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혼자이지도 않은 게 프리랜서였어요. 앞으로는 모르는 분의 일도 하고 싶은데 한아름 브랜딩과 세일즈를 확실히 해야 가능한 일이겠죠. 지금부터 씨를 조금씩 뿌려서 내년에는 싹을 더 틔울 수 있게 포트폴리오 정리도 슬슬 시작해야겠어요. 혼자라서 힘들지만 마냥 혼자이지도 않은 프리랜서 일을 더 알아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