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 '아참 정산금 신청해야지' 생각이 들어 번쩍 눈이 떠졌다. 오랜만에 들어온 프리랜서 일 대금 정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윗집에서 쿵쿵, 드르륵, 쿵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더니 베란다 창문 밖으로 사다리가 올라갔다. 올려다보니 바로 윗집이 맞다. '아… 오늘 이사하나 보네. 집에 있긴 글렀다.'
안 그래도 잠귀 마저 밝아서 자고 있을 때 말을 걸면 척척 대답을 해댈 정도인데, 맑은 정신에 아주 또렷한 소음이 초단위로 귀에 박히니 모든 감각이 예민해졌다. 집 주변은 오피스 건물이 많아서 카페에 가봤자 점심시간에 직장인들로 붐비고, 사무실이 밀집되지 않은 동네에 있는 카페를 찾았다. 집에서 멀지 않은 보라매역이 제격이었다. '얼른 나가자.. 얼른!'
언제나 다이어트를 입에 달고 사는 다이어터지만 아침을 부실하게 먹은 탓인지 카페 쇼윈도에 있는 케이크가 한눈에 들어왔다. '강제로 밖에 나왔으니 케이크 하나 정도는 먹을 수 있지!' 하며 케이크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일단 얼마 남지 않은 에세이 책을 집어 들었다. 한쪽 읽고 케이크 한입, 한쪽 읽고 케이크 한입을 반복했다. 사실 반쪽 읽고 케이크 두입이었던 거 같다.
케이크를 먹어치우고 널찍한 자리가 났기에 짐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에세이를 다 읽고 노트북을 열었다. 난 지금까지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로 먹고사는 일을 하고 싶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이렇게 매일 작은 글을 쓰면서 말이다. 기자 공채를 알아봤고 국내 유명 작가들을 검색해서 이력을 쭉 읽어봤다. '폴인'이라는 유료 지식 콘텐츠 사이트에서 엔지니어였다가 에디터가 된 손현님의 글을 읽으며 약간의 힌트를 얻기도 했다. 지금도 연재 글을 계속 읽어 보고 있다.
마음속에 하고 싶은 것은 많았다. 드라마를 워낙 좋아해서 드라마 PD를 꿈꾸기도, 드라마 작가를 꿈꾸기도, 영화감독을 꿈꿔보기도 했다. 썼다 지웠다 했던 꿈만 수십 가지가 넘는다. 하지만 수없이 지우다가도 결국 남는 단 한 가지는 무언가를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상이 되었든 사진이 되었든 글이 되었든, 표현하는 일을 하고 싶은 것이었다. 영상은 배우다 보면 카메라도 사야 하고 기법도 다양하게 배워야 하고 편집도 배워야 한다. '내가 그걸 다 배우고 싶은 열정이 있나?' 생각해봤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것도 '방송은 사생활과 상관없이 굴러가야 하는 일이 많을 텐데 내가 그걸 감수할 수 있나?' 생각해봤다. 무슨 일이든 겉보기엔 화려해도 궁극적으로 지금껏 추구해온 가치관과 일치하는지 자문해야 했다. 일도 일이지만 언젠가 가정을 이루게 된다면 가정도 일만큼 소중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사생활을 뒤로 미뤄야 하는 그런 극적인 몰입을 요하는 일은 중간에 그만둘 확률이 높을 것 같다. 그래서 머릿속에서 방송국, 영상 관련 직업은 지웠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결국 글은 글로 남을 수도, 영상으로 변환될 수도 있다. 브런치의 메인 문구가 생각났다. C.S. 루이스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나는 지금 쥐뿔도 없다. 하지만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 하나는 결코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 아직도 철없이 낭만을 꿈꾸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하며 기회를 계속 찾는다면 뭐든 불가능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뒤죽박죽인 생각 속 빛을 잃지 않은 단 하나를 발견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애석하게도 윗집의 쿵쿵, 드르륵 소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