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희 소설집/사계절/2017
새책과 헌책을 골라 읽는 주말의 어린이, 청소년 도서 리뷰 No. 20
그 순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매일 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천재지변과 전쟁과 핵폭발, 외계인의 침공이 아니라
깊은 한숨 소리와 소리 죽인 슬픔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조금씩 무너져 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방주> p. 36~37 中
여덟 편의 단편이 실린 청소년 소설집을 읽었다. 제목은 <바다,소녀 혹은 키스>
밝고 경쾌한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소설집 전반에 흐르고 있는 정서는 고독과 적막이다.
언젠가 어푸스름한 새벽, 바다 위로 천천이 솟아오르는 해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떠올랐다.
가라앉고 있다.
어둡고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손을 잡은 채, 무나와 나는 점점 더 깊이 가라앉았다.
무언가 기억이 날 것 같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왜 무나와 나, 둘만 남게 되었을까.
<무나의 노래> p. 194 中
해가 떠오르는 일출을 보는데, 그때 나의 감정은
역설적이게도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혼자 있었던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그래서 이 소설집에 나오는 소녀와 소년들의 마음과 동화될 수 있었다.
안개속에서 희미한 형체들이 어른거렸다.
마치 어두운 밤, 창으로 비쳐 든 달빛이 벽에 그린 그림자처럼 수상쩍었다.
기억나지도 않는 꿈쏙을 떠돌던 두려운 존재들처럼 괴이하게 흔들렸다.
수영장 불빛은 더욱 파르스름하게 빛났다.
한르을 올려다봤지만 달은 보이지 않았다.
수런거리는 소리는 조금 더 커졌다.
마침내 그림자들이 숲을 빠져나왔다.
<수영장> p.218
이 소설집 곳곳에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장면들이 많다.
그런 장면들은 괴이하지만, 아름답고
공허하지만 단단하다.
작가가 문장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지고,
상처와 치유에 대해 많은 말들을 하지 않아도,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자 했던, 그러나
때로는 그러지 못해 아프고 괴로웠던 그 간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문장 속에 스며들어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