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5일 개봉/ 장르 - 슈퍼히어로,액션,SF,어드벤처
그때그때 생각나면 찾아오는 비정기적 SF 장르 리뷰 No. 18
※ 주의 : 이 리뷰에는 영화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의 주요내용 및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최근 개봉한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을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은 성탄 선물 같은 영화였다.
마음 속 한 어딘가에 고이 간직해두었던 추억의 보따리를 풀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평행우주에 있는 또 다른 스파이더맨들의 존재를 각인시켜준 건
소니의 장편 애니메이션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가 먼저였지만,
정말이지 MCU 영화인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에서 1대 스파이더맨인 토비 맥과이어와
2대 스파이더맨인 앤드류 가필드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미 완결된 기존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주인공들을,
그것도 3대 스파이더맨인 톰 홀랜드가 주역으로 활약하는 이 시리즈에서,
한 자리에서 보게 될 줄이야.
그동안 SF 장르에서 평행 우주니, 멀티버스니, 다중차원이니 하는
개념들을 심심찮게 보아왔지만
솔직히 머리로든 가슴으로든 이해가 잘 안됐다.
그런데 그동안 스파이더맨의 역대 시리즈를 시간 순으로 쭉 따라가며
그들의 성장 스토리를 지켜봐온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영화만큼은 평행 우주라는 개념이 가슴 한복판에 확 꽂혔다.
그래,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시간동안 저들은 저렇게 살고 있었구나.
이 무한한 우주 어디에서인가는 저들의 이야기가 끝이 아니고, 계속 되고 있었구나,
하는 묘한 안도감 같은 거.
처음에 이 영화의 스토리라인만을 따라 갔을 때는 주인공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또 어린애처럼 행동해서 대형 사고를 치고, 그걸 수습하는 이야기인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말처럼 그냥 빌런들의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면 그만인 것을,
빌런들에게도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피터 파커의 그 신념 때문에
결국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나, 싶기도 했다.
피터 파커 역시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되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깊은 자책감에 빠지기도 했다.
이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건, 바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주인공이자
2대 스파이더맨인 앤드류 가필드가 공중에서 추락하는 MJ를 구하는 장면부터였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서 피터 파커는 공중에서 추락하던 자신의 여자친구 그웬을
거미줄로 붙잡아 구하려했지만, 그 순간의 반동 때문에 그웬은 결국 피터의 곁을 영영 떠나고야 만다.
그래서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고 MJ를 다른 방식으로 구해낸다.
만약, 그때 자신이 어떻게 행동 했더라면, 좋았을까 그 순간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연구해왔을
2대 스파이더맨의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아, 이 영화는 치유의 영화구나, 빌런을 물리치는 영화가 아니라,
빌런도 자신을 괴롭히던 고난에서 해방된다면 과거에 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말하고 싶은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나는 비로소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피터 파커를 철없는 소년이
아닌, 히어로, 즉 영웅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만약 피터 파커가 빌런들을 닥터 스트레인지의 말대로 그들의 차원으로 그냥 돌려보냈더라면
이런 순간은 오지 않았을 테니까.
1대 스파이더맨인 토비 맥과이어 역시 만약 내가 그 순간 이렇게 행동했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순간과
맞닥뜨려 그때와는 또 다른 선택을 하게 되고, 비로소 그때의 죄책감에서 해방된다.
이렇게 스파이더맨들이 자신들의 깊은 트라우마에서 해방되는 동안
빌런 역시 자신들을 악의 화신으로 만들었던, 고통의 순간들로부터 해방되고,
이들에게도 피터 파커가 말하는 2번째 기회가 생긴다.
다른 차원에서 온 스파이더맨과 빌런들이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간 후
이제 피터는 영화 초반과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이번에는 닥터 스트레인지에게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본인을 지워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가족도, 연인도, 친구도 잃은 채 홀로 된 피터가 눈 내리는 뉴욕을 활강하는 장면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피터가 활강하는 도시의 아래에는 트리의 불빛이 반짝이고,
뉴욕 시민들이 스케이트를 타며 각자의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있는 풍경이 보인다.
철저히 혼자 적과 싸워 왔던 다른 스파이더맨들과는 달리,
슈퍼 히어로 동료들과 팀으로 활동하며
한편으로는 가족, 친구, 연인과도 행복한 추억을 쌓아가던 피터는
이제 그 모든 것들을 잃어버린 셈이지만
그럼에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쓸쓸하지 않았던 것은
피터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결정이,
'다정하고 친절한 우리의 이웃 스파이더맨'으로 남길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의 다정하고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이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들을 모두 잃으면서까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일상의 어느 한 장면.
평범한 뉴욕 시민들이 각자 누리는 저 마다의 크리스마스.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은
감독이 바뀌고, 주연 배우가 바뀌어도,
내가 왜 이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매번 챙겨보았나, 라는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