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장편소설/ 문학동네/ 2016년 출간
다시, 새롭게 읽는 김연수의 작품 No.1
20여년 전 어느 날, 나는 이 책을 읽고 내 방에 김연수 컬렉션을 만들게 됐다.
시간이 흘러 구판은 절판되었고, 나도 이 책의 존재를 서서히 잊고 있다가
몇 년 전 개정판이 출간되면서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
사실, 개정판을 구매하긴 했지만 구판과 개정판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알지 못한다.
문장이 달라진 곳이 있는지, 구성이 조금 달라졌는지 세세한 차이를 짚어낼 재주가 내게는 없다.
지금 쓰고 있는 리뷰도 거의 구판의 기억에 의존해서 쓰고 있다.
이 책의 개정판을 구매한 지도 시간이 꽤 지났는데 새삼 다시 소환하는 이유는
김연수의 작품(소설, 에세이 등등)들을 다시, 새롭게 읽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김연수 컬렉션’을 열게 된 이유가 9년 만에 그의 신작 소설집이
지난 주에 출간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아직 읽어본 적도 없는 그 책과의 만남은 조금 미루고
오늘은 <꾿빠이, 이상>을 꺼내본다.
<꾿빠이, 이상>은 박제되어 버린 천재인 이상이 창조해낸 그의 신화를 믿을 것이냐, 믿지 않을 것이냐의 문제에서부터 출발한다. 총 3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소설은 이상을 뒤쫓았던 3명의 주인공을 통해 '이상'의 신화의 허구와 진실에 대해 묻는다.
모두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이들은 이상과 김해경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자신들이 간직해야 할 ‘비밀’이 무엇인지, 그리고 문학의 아류와 삶의 아류를 정의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서서히 허구와 진실의 경계에 대해 깨달아간다.
이 소설은 3개의 텍스트가 겹겹이 쌓여가며 진행되는데 <오감도 시 제 16호 실화>의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세 번째 이야기인 「새」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진다.
이 시가 이상의 시를 모방한 아류작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이상의 시를 넘어선 경지의 창작시인지 판단하는 것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가장 핵심적인 열쇠다. 이것은 허구의 진실을 창작하는 소설 쓰기와도 관련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 현실을 모방한 아류작에 불과한 것인지 그것을 넘어선 경지의 새로운 창작품인지 따져보는 것은 글쓰기의 본질을 되짚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신화는 본디 한 사람에 의해 창작되는 것이 아니다. 이상의 신화 역시 김해경 혼자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시작은 자신의 삶을 ‘이상’이라는 문학에 던진 김해경이 했을지 모르지만 그 신화를 완성시킨 것은 신화 속 주인공과 자신의 삶을 동일시했던 추종자들이다. 따라서 추종자들은 신화를 입맛에 맞게 끊임없이 변형하며 재탄생 시킨다.
『굳빠이 이상』은 이상이 이룩했던 신화를 파괴하는 책이며, 동시에 그것을 견고하게 만드는 책이다. 파괴의 과정이 없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 문학이 완성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죽음이다.
김해경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면서까지 완성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상'이라는 문학이었다.
<꾿빠이, 이상>!
작가는 이 말을 통해 이상을 죽이는 것만이 그를 영원히 살려두는 길임을 넌지시 말한 것은 아닐까?
문제는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라는 것이죠. 보는 바에 따라서 그것은 진짜일 수도 있고 가짜일 수도 있습니다. (…) 이상과 관련해서는 열정이나 논리를 뛰어넘어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란 말입니다. 진짜라서 믿는 게 아니라 믿기 때문에 진짜인 것이고 믿기 때문에 가짜인 것이죠.
p.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