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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탱글통글 Oct 23. 2017

소소한 일기(10월)

쌀쌀한 바람이 불어온다

1.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이 내가 들어오는걸 보자마자 "아이스 아메리카노 제일 큰 사이즈로 맞으시죠?"라고 물었을 때, 나는 같은 질문을 했던 올해 봄까지 근무한 전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

일기를 쓰는 와중에도 그 사람의 헤어 칼라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꽤 친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마치 생일을 깜빡하는 노인처럼 기억에서 점점 잊혀져 갔다. 기억한다는 것,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의 시작과 끝은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



2. 나는 뭔가 잘해보려 할수록 서투르다. 평상시에는 별생각 없이 그럭저럭 해냈던 것들도 마냥 실수투성이가 되어버린다. 첫 데이트가 그랬고, 어머니께 해준 파스타도 그랬다. 그래서 간혹, 나를 서투르게 대하는 사람을 만날 때면 '혹시?' 하는 마음이 들곤 하는 변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열의 여덟은 그저 매너 없는 사람일 뿐이지만..



3. 열광하는 소녀들에게 둘러싸여 열심히 춤을 추는 아이돌을 보면서 멋있다기보단 '꿈틀거리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 다큐멘터리에서 본 구애의 춤을 추는 조류를 떠올린다. 이제 나도 아저씨가 되어버렸다.





4. 친구가 "인터넷에서 봤는데... 원하는 모든 조건으로 태어날 수 있는 대신 평생 이름을 '김고추덜렁덜렁이'로 살래, 아니면 그냥 지금처럼 살래?"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김.고.덜.덜이 과연 부끄러운 이름일까?'라고 열심히 고민했던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나는 '김.고.덜.덜' 보다는 존중받아야 할 존재인데...



5. 개인적으로 작년 가장 최악이었던 하루에, 어떤 여자 두 명이 "얼굴에 빛이 가득해요. 오늘 좋은 일이 있으셨죠?"라며 다가와서 30분가량을 도에 대해서 떠들었다. 덕분에, 그 날은 화도 못 낼 만큼 정말 힘든 날이었지만 지금 떠올리면 즐겁게 떠들 수 있는 좋은 하루의 추억으로 변해버렸다. 그 두 분은 정말로 도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6. 기본적으로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는 개개인은 착하거나 섬세한 경우가 많다. 그 사람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섬세함이 뭉쳐서 만들어내는 집단의 분노와 광기가 정말 무서울 때가 있다.



7. 갑각류인 홍게는 탈피 과정을 거치며 성장한다. 이 과정이 만만치 않아서, 탈피 도중에 힘을 다 소모하고 죽는 경우도 있다. 포유류처럼 시간이 흐르면 그럭저럭 자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성장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성장을 마치고 나면, 결국 그물에 잡혀 맛있게 요리돼 식탁 위에 올라간다. 인생이란...





8. 동생과 차를 타고 오는 중에 '짝사랑' 이야기가 나왔다. 오빠가 그런 풋풋한 사랑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동생은 말했다.

나는 짧은 시간 지나가는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꼬리가 올라간 눈매, 부드러운 몸선, 단풍이 든 나무, 일렁이는 햇살과 강아지의 기지개 같은 것들. 그런데 그 여자는 처음으로 먼 미래에 자글자글 늙게 되더라도 여전히 아름다울 것만 같은 확신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알까? 내가 이 정도로 당신을 좋아했다는 걸? 아마 모를 것이다.



9.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투덜거리는 나에 그 형은 "아니야, 내 기억 속에서 영원할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그 이 너무나 반짝이고 있어서, 나는 덜컥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고생 많았습니다. 영원의 기억 속에서 편안하시길.



10. 24살 때인가.. 제일 친한 친구로부터 "나는 회는 싫어하지만, 초밥은 정말 좋아해."라는 고백을 들은 뒤로, 나는 인간을 정의 내리는 것을 포기했다. 사람은 너무나 다양한 존재다. 그것이 매력이기도 하고.



11. 외로운 날은 달을 본다. 베란다에 의자를 두고 앉아서 멍하니 바라다. 어느 누군가도 나처럼 물끄러미 같은 달을 공유하고 있을 테니까. 그 사실이 묘한 위로가 된다. 혹시 외로울 때 달을 보는 사람이 이 글을 읽는다면 반갑습니다. 덕분에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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