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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훈 NOWer Nov 27. 2024

엽편소설 「효도계약」

어느 마흔 살 불효녀의 고향 방문


새로 옮긴 지 1년이 채 못 된 회사의 직속 상사는 나의 퇴사를 유감스러워했다. 병약해진 아버지를 간호해야 해서 고향집에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외동딸이라서요, 라는 사유를 영 못 믿는 눈치였다. 그는 나와 달리 ‘퇴사’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대신 ‘근로 계약 위반’이라는 용어를 고집하며 부하 직원을 ‘약속을 어긴 자’로 규정했다. 맞는 말이었기에 나는 거듭 죄송하다고 했다. 근속 기간 1년 미만인 퇴사자는 그렇게 송별회도 법정 퇴직금도 없이 일터에서 조용히 퇴장했다.


후임자에게 업무 인계조차 제대로 못 하고 나온 미안함과, 엄마 돌아가시고 5년 내내 홀몸이었던 아버지를 덩그러니 방치했다는 죄스러움. 이 두 가지 마음을 안고 고향 산촌으로 향했다. 운전하는 차 안에서 문득, 오래전 상경하기 전날 밤이 떠올랐다. 서울 가서 돈 많이 벌어가지고 호강시켜드릴게, 엄마 밭에 안 나가시고 종일 안방에서 텔레비전만 보시게 해드릴게, 아빠 입에 물리도록 일등급 한우만 구워드릴게, 좋은 남자 만나서 꼭 같이 올게,……. 군내 정육점에서 사 온 삼겹살을 구우면서 나는 약속했었다. 소줏불에 불콰히 익은 두 분의 너털웃음이 상추쌈마다 그득했던 여름밤이었다. 부모 자식 사이에 ‘효도 계약’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나는 변명의 여지 없이 위반자였다. 십수 년 전 그날과 같은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볼품없는 마흔 살 무직 미혼자가 되어 버린 ‘효도 계약 위반자’는 몸도 마음도 시렵기만 했다.


아버지의 상태는 전화로 들은 것보다 훨씬 참담했다. 무릎 관절에 이상이 생긴 것인지 허벅지, 정강이, 발목이 각기 따로 움직이듯 걷거나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이 몹시 부자연스러웠다. 어디서 넘어지셨냐고 재차 여쭤도 아버지는 별일 아니라는 투로 헤살헤살하기만 했다. 답답증이 폭발한 나는 직접 탐문 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무턱대고 마을 이장님 댁을 찾아갔다. 고향 마을이 원체 산재부락인 터라 한 집 건너 한 집 거리가 도보 삼십 분씩은 되는 탓에 나는 땀범벅이 되고 말았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부터 지금껏 이장직을 맡아 온 배추밭 주인 아저씨와 아줌마(지금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셨지만)는 ‘형님네 딸내미’를 집으로 들이고는, 미풍이었던 거실 선풍기의 바람 세기를 강풍으로 바꿨다. 아줌마가 내온 냉오미자차를 들이켜고 나서야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설날에 아버지만 뵙고 급히 떠나느라 인사 못 드려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 뒤, 아버지의 몸 상태에 관해 여쭈었다.


“너도 알지? 한약방 장남 있잖냐. 아래로 동생들만 넷인 갸 말여. 갸가 올봄 선거 때 여그 국회의원 됐잖냐. 우리 마을에 유세한다고 수시로 왔었어야.”


동문서답 격으로 운을 뗀 이장님의 이야기는 꽤나 길고 극적이기까지 했다.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한약방 장남은 후보 시절 자기가 나고 자란 이 벽계산간에 상당한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지역 맞춤형 공약도 발표했는데, 그중 하나가 ‘어르신 건강 버스’라는 것이었다. 도보로 두 시간, 버스로 한 시간 거리인 군내와 산촌 간 운행 버스를 최대 다섯 대까지 늘리고 배차 간격을 30분 안팎으로 단축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왕진 의사가 버스를 타고 이곳 어르신들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안까지 담겨 있었다. 현재 딱 두 대뿐인 데다 한 번 놓치면 세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교통 불편을 해소할 뿐 아니라, 깊디깊은 산골 노인들의 건강까지 헤아리는 속 깊은 공약에 마을 주민들의 마음이 크게 동했다. 한약방 장남은 당선 후 최우선 과제로 어르신 건강 버스를 도입했다. 약속을 지킨 것이다. 하지만 두 달 후 사실상 전면 무효화가 되었다. 설상가상 어르신 건강 버스뿐 아니라 원래 있던 버스까지 운행이 멈춰 버렸다.


“갸가 공부를 솔찬히 했거든? 서울서 무슨 아무개 국회의원 보좌관이었다고 했지 아마? 근디 즈그 아버지 일찍 여의고, 엄마 몸져눕고 나니까 여그 와서 자리를 잡아 버렸어야. 동생들은 뭔 골이 났는지 죄다 뿔뿔이 흩어져가지고는 집에 한 번을 내려와 보덜 않고 말여. 하기야, 한약방 영감네 옛날부터 허구한 날 ‘우리 장남, 우리 맏이’ 하고 다녔응께, 밑으루 있는 애들이 서운할 만도 혀. 아무튼지간에, 서울서 갸가 모셨던 국회의원 양반이 이짝 지역에다 자리를 좀 터 준 모양인가 보더만. 갸가 어른 대하는 거 하나는 아주 극진했어야. 그래서 그렇게 공약 지킨다고 운수사 사람들을 쥐 잡듯이 볶았던 것 아니겠나 싶네 나는.”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이장님의 ‘주장’에 따르면, 한약방 장남은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의 ‘운수종사자 준수사항’이라는 조항을 들먹이며 지역 내 운수 업체를 압박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사전 예고 없이 안전 설비 및 등화 장치 점검 실태 조사를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운행 차량을 다섯 대로 늘리고, 기사를 증원하고, 월 1회 의료 목적의 특별 배차까지 신설했다. 이에 운수사 대표와 일부 기사들이 파업을 선언해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산골 노인들은 걸어서 군내 시장과 마트를 오갔고, 그렇다 보니 한 분 한 분 몸이 상하게 된 것이었다.


“버스 기사 한 놈이 내 친구여가지고 이거, 이쪽 편 들기도 뭣하고 저쪽 편 들자니 또 불편하고 그렇거든? 그래서 말이다. 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야. 갸 부모가 건강히 잘 살아 계시고 말여, 동생들이랑도 우애가 깊게 자랐으면 말이다, 지금처럼 막 효도에 집착하지 않았을 거다, 하고. 그랬으면 갸가 국회의원 되어갖고 멀쩡한 운수사 뒤집어 놓는 일도 없었을 거고, 버스 두 대로 어찌저찌 잘 돌아댕긴 우리 마을 사람들도 그냥 평소처럼 살았을 거 아니겠냐 이 말이여.”


이장님은 잠깐 말씀을 멈추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민망스러워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형님은 아무리 술을 마셔도 딸내미 얘기는 한 번을 안 해야. 내가 언젠가는 물어봤다. 외동딸 죽었나 살았나 궁금하지도 않소, 하고. 형님이 이러셨다. ‘행복하게 잘 사는 딸애 걱정을 내가 왜 혀.’ 아가, 부모 맘이 다 그런 거다. 너 행여나 무슨 효도한답시고 난리 피우고 그럴 생각 하덜 말어. 형님 댁은 내가 날마다 뻔질나게 드나등께, 넌 걱정 말고 서울서 행복하게 너 볼일 보며 살면 되는 거다, 이 말이여.”


뙤약볕에 그을린 이장님 내외 두 분의 검불그스름한 피붓결이 꼭 그날 밤의 우리 엄마 아빠 같았다. ‘정말, 서울에서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예요? 진짜로 그래도 돼요?’ 이 질문을 삼키기 위해 나는 오미자차를 한 잔만 더 주십사 부탁드렸다. [끝]


글 임재훈

portfolio | @nowing_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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