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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훈 NOWer Feb 08. 2024

단편소설 「푸른달길에 누워」 #4

“달이 그것인지 그곳인지도 아직 못 정한 주제에.”


‘우리 자신이 한 부분으로 속해 있는 어떤 전체의 일부.’


어느 책에서 읽었던 한 문장이 술병 더미 아래에서 느리게 깜빡였다. 들숨과 날숨에 맞춰 용명과 용암을 반복하도록 설정된 바이털 사인 램프처럼. 막걸리 병과 맥주 병도 자신들이 덮은 빛에 겉묻어 천천히 발광했다. 헤집어 문장을 꺼내고 싶었지만, 의식은 취하고 멍들고 접질린—한쪽 발목이 계속 욱신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심하게 삔 것 같다.—몸과 동화된 듯 내 의지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머릿속 점등과 멸등에 따라 후두부가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눈을 감으면 별안간 세탁기 도는 소리가 머리통을 때렸다. 드럼통 안에서 술병들이 와르르 뒤끓었다. 문장이 빛의 조각으로 마디마디 끊어져 소란을 피웠고, 굴러다니는 말마디들을 이어 붙여 읽어 보려 할 때마다 이마부터 눈두덩이까지에 거센 압각이 느껴졌다. 다시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제자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안 된다.


‘SAT | AM 02:31 | SUNNY’. 빛나는 글씨 위로 크고 작은 날벌레들이 여전히 와글거렸다. 우리 자신이 한 부분으로 속해 있는 어떤 전체의 일부. 나는 이 문장을 주문처럼 외웠다. 조난자들이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아무 말이든 사뭇 잇는 것처럼. 『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 아니, 『말 없는 사뮈엘 베케트의 삶』이었나. 베케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얇은 소설이었다. 아닌가, 산문집이었나, 평전이었나. 평전이 얇을 리는 없을 테니 소설 아니면 산문집이었을 것이다.


처음 읽었을 때는 비문인 줄 알았다. ‘한 부분’과 ‘일부’는 중복이므로 ‘우리 자신이 속해 있는 어떤 전체의 일부’라고 쓰는 편이 옳다고 여겼다. 해당 페이지에 마킹 테이프를 붙여 놓았다. 출판사 홈페이지의 오타·오역 신고 게시판에 제보할 의도였다. 한데 계속 곱씹으니 말이 되는 것도 같았다. 문장의 ‘우리’ 자리에 ‘나’를 대입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 자신이 한 부분으로 속해 있는 어떤 전체의 일부.’


나는 스물두 살 대학생들이라는 전체의 일부에 속해 있다. 그러면서도 스물한 살 대학생들과 동기 관계다. 그렇다고 모든 스물두 살 대학생들이 선배인 것도 아니다. 원래 다녔던 경영학과 애들은 동기, 현재 소속된 문창과 사람들은 선배. 나는 스물두 살 대학생들의 세계에 ‘전적으로’가 아니라, 특이 사항이라 할 만한 ‘한 부분’으로 속해 있다. 따라서 내가 속할 수 있는 세계란 오롯한 전체가 되기 어렵고 ‘전체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초콜릿이 함유된 과자를 집합시킨다. 내 정체성은 ‘초코송이’다. 내가 합류할 곳은 절대다수 ‘초코파이’의 세계뿐이다. 그곳에는 나 말고도 소수의 ‘초코비’와 ‘콘초’가 와 있다. 초코송이·초코비·콘초는 초콜릿 과자라는 전체의 일부로서 초코파이 무리에 한 부분으로 속해 있게 된다.


우리 자신이 한 부분으로 속해 있는 어떤 전체의 일부.


여전히 이 문장은 껄끄럽게 읽혔지만 마킹 테이프는 떼기로 했다. ‘한 부분으로’를 삭제하는 편이 훨씬 직관적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때로는 문장의 번잡함이 어떤 독자에게 위안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문장도 책에 인쇄되는 세상이다. 나 같은 ‘비문’이 문창과 안에 있다고 해서 삭제될 일은 없으리라. 그러니 안심해도 된다.


과대표와 싸운 이유가 생각났다.


남자애들끼리 군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입대 시기를 서로 묻던 중이었다. 이 학년 마치고, 삼 학년 일 학기 끝내고, 아싸리 졸업 후에 등등. 그러다 과대표가 시비를 걸었다. “형은 안 가잖아?”라고 했던 것 같다. “색각 이상자는 현역으로 안 받아줄 걸?” 초코파이를 우물거리며 녀석이 말했다. 책상다리한 녀석의 한쪽 무릎에 여자 후배가 노란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쓰러져 있었다. 과대표 입에서 떨어진 부스러기가 모발 위에 비듬처럼 내려앉았다. 초코파이를 술안주 삼는 녀석이 여전히 보기 역했으나 똑바로 대면해 정정할 필요가 있었다. 병역 판정 검사의 신체 등위 규정에 색각 이상자 관련 조항은 없다, 몸 멀쩡하고 정신 또렷한 인간이면 다 현역병 된다, 내가 안 알아봤겠냐, 너야말로 열폭 성향이 강해서 신검 말고 심리 검사 때문에 면제될지도 모르겠다, 네 경우는 심층 면담까지 해야 할 걸, 열등감 콤플렉스면 군 생활이 쉽지는 않겠지 아무래도, ⋯⋯. 사이사이 쌍소리도 섞었을 텐데 그런 세부적인 요소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선배도 아닌 게. 등단도 못한 게. 꼰대처럼 지적질은. 형이랍시고.”


과대표의 이 말이 마지막이었다. 멱살을 누가 먼저 잡았더라. 아무튼 민박집 안에서의 장면은 거기까지였다. 녀석이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누워 있던 초코파이 후배의 머리통이 바닥을 찧었다. 쿵, 하는 소리가 났던 것 같다.


아직도 몸은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무리를 하면 팔 하나쯤은 들어올릴 수 있을 것도 같지만, 대신에 전신을 휘감치는 극심한 통증을 감당해야 하리라.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과대표의 코골이와 이갈이는 이제 밤벌레 소리의 일종으로 들릴 지경이었다. 녀석의 신체는 숙면과 함께 확실하게 회복되고 있다. 놈이 먼저 깨어나 두 발로 서고, 불능 상태인 나를 내려다본다면? 그러면서 여봐란듯 초코파이를 뜯어 먹는다면? 사지가 벌떡거릴 상상이었으나 팔다리와 등허리는 요지부동이었다. 제발 잠이라도 들었으면.


과대표의 스마트폰은 배터리를 소진한 모양이었다. 유일한 불빛이었던 디스플레이 화면은 그 많던 날벌레들을 데리고 일순간에 땅으로 꺼져 버렸다. 온 사위가 까만 산자락 흙무덤. 그 안에 빠져 눈만 동동 뜬 기분으로 나는 밤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아니지. 누운 자세이므로 올려다보기가 아니라 전방 주시라고 해야 비문이 아닐 것이다.


어차피 계속 누워 있는 주제에. 비문 고쳐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올려다보았다’라 적는다고 현실의 몸이 정자세로 교정될 리도 없는데.


후우, 달을 겨냥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두 번째 숨을 쏘아붙이자 달은 약간 새파르족족한 빛을 띠었다. 종종 이런 경우가 있다. 자연광과 인공광이 남김없이 부재한 암흑일 때 특히. 시계(視界) 전역에 청색 셀로판지가 드리워지듯 푸른 톤의 상이 눈에 맺히고는 한다. 시신경이 만들어 내는 허위의 색, 푸른 허상이다. 고등학교 때 동네 안과 의사는 디지털 카메라의 화이트 밸런스 기능을 예로 들기도 했다. 정확한 원인은 진단하기 어렵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자, 삼원색 각각의 신호 회로가 연동해 색을 재현해야 하는데 자네의 눈은 적색과 녹색 쪽이 약해서 청색 회로의 노동량이 과중하다, 외부의 빛이 미약할수록 적록은 무력해지고 청은 사실상 혼자가 된다, 그렇다 보니 일순간 자기색을 발산한다, 컬러 프린터에 파란색 잉크밖에 안 남은 상황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거다, 웬만하면 어두운 데 장시간 있는 일을 삼가라.


이제 달은 완전한 청색이었다. ‘나의 밤은 유골함 같은 회색 달의 시간이다.’라고 나는 썼었다. 유골함은 이제 알맞지 않다. 나의 밤은 (     ) 같은 푸른 달의 시간이다. 이렇게 고쳐 써야 한다. 괄호 안에 무얼 넣어야 할까. 회색 달이 아니라 푸른 달과 조응하는 무엇. 뭐가 있을까.


달의 색채가 회색에서 파랑으로 바뀌었을 뿐인데 내 상상계는 곤궁해지고 말았다. 회색 달의 문장을 고민할 때가 비교적 수월했던 듯싶었다. 유골함 외에도 후보들을 여럿 지어낼 수 있었다. 미장공이 흘린 회죽, 실행되지 않는 앱 아이콘, 아무도 안 지키는 신호등, 잘못 박힌 정두(釘頭), 금연 구역의 재떨이, ⋯. 무용지물로 고정되어 버린 대상들이 속속 잘도 떠올랐다. 그러다 아예 죽음의 심상으로 나아가더니 결국 유골함에 이른 것이었고. 회색 달의 본색을 되찾아 마침내 색챔의 삶을 복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 줄거리는 구상맞고 문장은 자리자리한, 누가 읽어도 대학생의 초작임을 간파할 허름한 엽편소설이었다.


그러니 다시 써야 한다. 우선은 첫 문장부터. 팔다리와 등허리가 다시 움직거려질 때까지, 과대표 녀석이 깨어나기 전에. 회색은 지운다. 새로 쓰는 달은 푸른색이다.


안과 의사 말 기억 안 나? 저 달은 네 눈이 파랗게 날조한 허상이잖아. 회색이든 뭐든 고쳐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달이 그것인지 그곳인지도 아직 못 정한 주제에.


아직 첫 문장도 안 쓴 소설을 합평하는 목소리가 코골이와 이갈이에 섞여 들어왔다. 어둠 속의 내재 음향을 혹평하여 맞서면서, 나는 푸른달길에 누워 집필에 몰두했다. 새까만 화면 위에 뜬 푸른 커서. 이윽고 그것은 그곳이 되었다. 이제 쓰기만 하면 된다. 그곳은, 나의 밤은⋯⋯ [끝]


— 사진: 보름달(슈퍼 블루 문), 2023년 8월 31일, 직접 촬영





글쓴이. 임재훈

윤디자인그룹이 운영하는 온라인 디자인 매체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에디터로 근무했다. 타입·타이포그래피 전문 계간지 『더 티(the T)』 9·10·11호의 편집진 일원으로 일했다. 경기도시공사, 한국언론진흥재단, 효성그룹 등 국내 기업 및 기관의 홍보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저서로 『실무자를 위한 기업 홍보 콘텐츠 작법』과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공저로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와 『소셜 피플』(총 8부작)이 있다. 2023년 단편소설 「공동(空洞)」으로 스토리코스모스 신인 소설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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