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재훈 NOWer Feb 08. 2024

단편소설 「푸른달길에 누워」 #3

“온통 무채색이었다. 교정 안경을 분명 쓰고 있었는데.”


‘이 학년이 되었다’와 ‘스물두 살이 되었다’. 어느 쪽이 더 나한테 적합한 정체성일까. 한 살 어린 동기들과 동갑내기 한 학번 선배들. 대학 생활의 평준점을 둘 중 어디에 맞춰야 지금의 나 자신이 온건해질 수 있을까. 경영학과 삼 학년이 되었을 과거의 동기들도 엠티 따위는 가지 않을까. 봉사 활동, 아르바이트, 인턴십 프로그램, 자격증 시험 공부 등등을 하느라? 이제 걔들은 꼭 일 년만큼 내 인생 선배로 앞서 나가는 걸까.


요 며칠 침대 위에서 했던 생각을 푸른달길 흙바닥에 뻗어 떠올리는 중이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등허리를 일으킬 수가 없었다. 가만히 누워 최소한의 기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나를 이렇게 만든 과대표는 나와 팔뚝 하나 간격쯤 떨어진 곳에 등을 돌린 채로 누워 있었다. 디스플레이 상시 활성화 모드가 켜진 녀석의 스마트폰이 주인 머리맡에서 무드 등 노릇을 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깜깜밤중 자락 길의 유일한 불빛이었다. 다만, 광원에 인접한 색색의 개체들(일테면 풀들, 과대표의 베이지색 반소매 티셔츠)은 온통 무채색이었다. 교정 안경을 분명 쓰고 있었는데. 얼굴을 가격 당하면서 날아가 버렸는지도. 나는 누운 자세로 바지 양쪽 주머니를 양손으로 동시에 뒤적였으나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내 전화기는 또 어디로 날아갔을까. 폰까지 집어던질 정도로 격하게 싸웠나.


왜 싸웠더라⋯?


우리는 기와지붕을 인 민박집 별채 두 개 방에 짐을 풀고, 본채 거실에서 주인 아주머니가 차려 주신 저녁밥을 먹은 다음, 남자 방보다 평수가 더 넓은 여자애들 방에 둘러앉아 서울서 사 온 안줏거리에다 소주며 막걸리며 페트병 맥주며 캔 하이볼을 도열했다. 그리고 초코파이 한 상자. 데님 핫팬츠에 하얀 박스 티를 입은 일 학년 여자애가 과대표에게 두 손으로 전달했다.


“안주로 초코파이 드신다는 얘기를 들어서요. 오리온 말고 크라운 더 좋아하신다고. 그래서 일부러 사 왔어요. 이따가 저도 하나만 주세요. 맛 궁금해요. 초코파이에다 술 마시면 어떨지.”


술자리 내내 과대표와 그 후배는 붙어 앉아 있었다. 초코파이 하나를 반으로 갈라 서로 나눠 먹으며, 둘이서만 소주잔을 부딪히며 하하 까르르 웃었다. 소주에다 초코파이라니. 보기만 해도 역해서 가급적 두 사람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으려 애썼다. 


최근 잘 팔린다는 장편소설 몇 편에 대한 비평(안 읽은 애들은 그냥 듣기만 했다.), 지난해 등단한 고학번 선배가 다음 학기부터 시간 강사로 출강한다는 소식, 대학원생들과의 성추문으로 뉴스에 난 어느 중년 교수의 잠적 후 근황, 대형 출판사 편집위원이기도 한 학과장이 올해 특별 추천으로 등단시킬 주인공은 과내 행사 단 한 번도 참여한 적 없는 삼 학년 그 ‘아싸’ 선배가 유력하다는 설, 작년에 학생회장 했던 삼 학년 선배가 군대에서 병영문학상 받았다는 소식, 우리 학번도 잘 좀 써 보자는 건배사, 교양 과목 중에 에스에프 소설 쓰기와 웹 소설 쓰기 수업이 꽤 괜찮더라는 후기, 요새 방영하는 일일 연속극 극본을 보조 작가인 모 선배가 절반 이상을 쓴다고 하는데 크레딧에는 메인 작가 이름만 뜬다고 들었다는 추측성 제보, ⋯⋯. 이런 수다를 떨 때까지가 ‘기’와 ‘승’이라면, 푸른달길 위에 버려진 허수아비마냥 누운 지금은 ‘결’일 것이다. 과대표와 내가 민박집을 박차고 나가 육탄전을 벌이다 둘 다 길바닥에 뻗은 ‘전’의 조각은 내 머릿속 폐플라스틱 수거함—나는 막걸리와 맥주만 마셨다. 아마도.—어딘가에 떨어져 있으리라.


그래서, 왜 싸웠더라⋯?


조각을 주워 이어 보려 했으나 몸도 움직여지지 않았고 후두부만 더 띵해질 따름이었다. ‘SAT | AM 01:17 | CLOUDY & FOGGY’. 과대표의 전화기 화면 속 빛나는 타이포그래피 위로 날벌레들이 뒷담화라도 속살거리는 듯 윙윙대고 있었다. 지표면으로 바짝 내려앉은 새벽 산안개가 모로 누운 과대표의 등허리를 타고 넘었다. 한밤중 스마트폰 오엘이디 디스플레이가 밝힐 수 있는 경계는 딱 거기, 녀석의 등성이까지였다. 안개는 등마루를 넘자마자 까맣게 사라졌다.


이 모든 장면이 지금 내 눈에는 슈퍼 에이트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흑백 영화 같이 보였다. 언젠가 영화 유튜브 채널의 리뷰 영상으로 알게 된 〈노스페라투〉라는 천구백이십 년대 작품이 떠오르기도 했다. 드라큐라 백작이 등장하는 고전. 흑백 필름이라 교정 안경을 벗고 보아도 공포의 미장센 내지는 죽음 그 자체를 표현한 이미지들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었다. 시각성이 워낙 강렬해서 설령 음소거를 한다 해도 작품 감상에 큰 지장은 없을 것 같았다.


반면 지금 내 눈앞의 이 씬은 사운드가 필수 요소였다. 산자락 흙길 위에 널브러진 과대표는 살아 있는 신체라기보다 변사체에 가까운 이미지였다. 관객의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장치로서 코골이와 이갈이 소리, 즉 숨쉼의 효과음이 과장스럽게 지속되고 있었다. 이런 걸 영상 용어로 내재 음향이라고 했지 아마?(‘영화 예술의 이해’라는 교양 과목에서 배웠던 것 같다.) 과대표 놈, 죽지는 않았구나. 나는 맘놓고 누워 있기로 했다.


단편소설 「푸른달길에 누워」 #4로 이어집니다

— 사진: 보름달, 2023년 10월 28일, 직접 촬영






글쓴이. 임재훈

윤디자인그룹이 운영하는 온라인 디자인 매체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에디터로 근무했다. 타입·타이포그래피 전문 계간지 『더 티(the T)』 9·10·11호의 편집진 일원으로 일했다. 경기도시공사, 한국언론진흥재단, 효성그룹 등 국내 기업 및 기관의 홍보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저서로 『실무자를 위한 기업 홍보 콘텐츠 작법』과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공저로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와 『소셜 피플』(총 8부작)이 있다. 2023년 단편소설 「공동(空洞)」으로 스토리코스모스 신인 소설상을 수상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편소설 「푸른달길에 누워」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