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전문점 가배도 ‘짧은 글 드립백’ 수록 글
할아버지의 룽고
외할아버지에게 남은 기억은 에스프레소 한 잔 분량이다. 항암제는 팔십 평생 대부분을 천천히, 그리고 모질게 적셔 원두 찌꺼기로 만들어 놓았다. 2년 전만 해도 손수 내려 드시던 룽고처럼, 할아버지의 생애는 이제 120밀리리터 크기의 세미 데미타스 잔에 담길 정도로 극미해졌다. 매일 아침 아주 잠깐, 정신이 온전해지는 순간은 할아버지가 뜨거운 룽고 한 잔을 호- 불며 마시던 식후 티타임 정도로 짧다. 재고가 점차 소진되어 가는 귀한 원두처럼, 나는 그 소량의 시간을 아껴 음미한다. 오늘의 커피가 외손녀와 할아버지의 마지막 커피가 될 수도 있으니. 쓰디쓰지만 향만큼은 깊다.
서둘러 교복을 입고 현관에 앉아 신발 끈을 단단히 조인다. 묵직한 백팩을 이고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선다. 엄마, 아빠, 할아버지가 나란히 서 있다. 할아버지가 먼저 인사한다. “또 오세요.” 딸과 사위도 그 인사말을 따라한다. 나도 인사한다. “잘 마셨습니다. 또 올게요.” 바리스타로 살아온 할아버지에게 손녀는 이제 손님이고 엄마 아빠는 직원들이다. 할아버지의 룽고 한 잔이 우리 집을 카페로 만들었다.
(임재훈, 2024)
가배도 짧은 글 드립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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➅ 위 5종 세트
※ 메인 사진 및 매장 사진 출처: 가배도 홈페이지
글쓴이 임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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