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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희 Jan 20. 2019

진짜 공감능력이 부족한 건 나였다

<당신이 옳다> 독후감

1. 나는 공감능력에 꽤 집착하는 편이다.

같이 일하는 사람,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공감능력이 없을 경우 더 가까이 지내기는 힘들다고 판단한다. 예전에 받았던 <내마음보고서>에서도 '공감능력이 높은 사람은 더 좋게 보고 공감능력이 낮은 사람은 더 안 좋게 보는 경향이 있다'고 나왔다.

1-1. 왜 공감능력에 집착하게 되었나

'나'만 있고 '너'는 없는 사람의 경우, 무례한 말이나 행동을 할 때가 많았다. 나를 대하는 것처럼 너를 대하고 내가 괜찮으니까 너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이 만들어낸 무례함이었다.


나아가 문제의 해결은 공감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껴보는 것, 그 입장에서 필요한 것을 찾아보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1-2. 공감능력이 있으면 '더' 좋게 보는 이유는

나는 공감이 똑똑함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똑똑함은 '인지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에 가깝다.


수많은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나'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똑함과 거리가 멀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에게 공감능력이 있다는 건 단순히 따뜻하거나 경청하는 것 그 이상이다.


2. 진짜 공감능력이 부족한 건 나였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이 책을 읽으며 '진짜 공감능력이 부족한 건 나였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모두는 자기 보호를 잘해야만 다른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상처 입은 존재들이다. 예외가 없다. 공감자의 자격을 결정하는 기준을 내게 묻는다면 단연코 자기 보호에 대한 민감함이라고 말할 것이다.

어떤 기간 동안, 어떤 특정 맥락과 상황 속에서는 내가 참고 견딜 수도 있지만 나는 항상 그래야 하는 존재,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는 자기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어야 공감자가 될 수 있다. 나와 너를 동시에 공감하는 일은 양립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와 너 모두에 대한 공감’의 줄임말이 ‘공감’이다.


책의 표현에 의하면 나는 공감자의 자격이 없었다. 일상 속 나는 '너'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나'라는 존재에 공감하는 데 소홀했다. 사실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너인지 그 경계를 분명히 알지 못했다. 너에게 쉽게 내어준 많은 부분이 알고 보니 내 경계를 침범한 것들인 경우가 많았고, 깜짝 놀라 급하게 그은 경계는 너의 경계를 넘는 경우가 많았다.


공감과 관련해 일종의 클리셰가 있다. 공감은 누가 이야기할 때 중간에 끊지 않고 토달지 않고 한결같이 끄덕이며 긍정해 주는 것, 잘 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전혀 잘못 짚었다. 그건 공감이 아니라 감정 노동이다.


공감이 아닌 '감정노동'을 할 때도 있었다. 감정노동 후 나는 종종 피곤으로 예민해지곤 했다. 급기야 지속적인 감정노동이 요구되는 관계라 판단되면 잠수를 타기도 했다. 내가 경계를 인지하고 있었다면, 누군가 그 경계를 넘을 때 말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하진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저 "지금 네가 한 말이 나에게 굉장히 큰 상처가 되었어." "네가 갑자기 그렇게 나오니 내가 좀 난감하네."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서 내 상황이 많이 곤란해졌어." 등 상대에게 지금 내 경계를 넘어왔다고 말할 수 있었다면.


#내글은왜자꾸반성문이되는가ㅋㅋ


3. 진짜 공감을 했던 순간, 인터뷰


가끔 제대로 된 공감을 했던 순간들도 있었다. 바로 인터뷰 자리에서다. 인터뷰에는 '인터뷰어'도 있고 '인터뷰이'도 있다 어느 한쪽이 없는 인터뷰는 인터뷰가 아니다. 인터뷰어가 주로 듣는 사람이긴 하지만 마냥 듣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인터뷰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사는지 더 정확하게 알기 위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인터뷰는 누가 이야기할 때 중간에 끊지 않고 토달지 않고 한결같이 끄덕이며 긍정해 주는 것, 잘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인터뷰는 궁금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에 대해 공부하고 질문을 준비하고 묻고 듣고 더 자세히 다시 묻고 그 내용을 정성스럽게 정리하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심지어 아래 구절을 읽으면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인터뷰를 잘하지 못하더라도 '공감은 인터뷰와 비슷하다'는 마음가짐만 가지고 있다면 공감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공감을 잘하기 위해서 어떤 질문을 하는 게 좋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좋은 질문은 따로 있지 않다. 아이의 대답에 집중하고 궁금해하는 태도가 어떤 좋은 질문보다 더 좋다. 그 태도가 더 공감적이고 치유적이다.


얼마 전 지인들과 "혜신님은 신이다." "혜신님이니까 가능한 거다."라는 말을 농담처럼 했다. 이상하게 웃고 나니 마음이 허했다. 어떤 게 진정한 공감인지 알게 되었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니.


그런데 그냥 인터뷰를 하는 거라고, 상대를 궁금해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했다. 그게 '공감'이라면 왠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꼬물꼬물 올라왔다.


#인터뷰예찬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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