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째 내 뱃속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있다. 이름은 뚝이. 엄마가 될 나와 아빠가 될 존리가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는 이름이다. ‘오뚝이’라는 단어에서 따온 ‘뚝이’는 각자 원하던 느낌의 중간 어딘가에서 만난 이름이기 때문이다.
“부를 때 몽글몽글한 느낌이 드는 귀여운 이름 없을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귀여운 걸로 부족해. 강한 이름이 필요해.”
“강한 이름 어떤 거?”
“마스터치프(헤일로 게임 주인공), 제로(메가맨 게임 주인공)...”
“아니야아니야”
알 수 없는 게임 캐릭터 이름을 줄줄 읊으며 존리는 혼자 신이 났다. 귀여운 친구가 나오면 같이 총 쏘고 게임을 할 생각에 들뜬 것 같았다. 그러다 내 표정을 힐끔 보고는 다시 귀여운 이름을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수많은 이름을 거절당한 후 나의 오케이를 받은 유일한 이름이 뚝이다. 쓰러져도 바로 일어나는 오뚝이.
귀엽지만 강한 친구가 벌써 내 손바닥만하게 컸다. 며칠 전부터는 배에서 꼬물꼬물한 느낌이 든다. 아직은 강하지 않고 귀엽게 움직이고 있다.
사실 이런 느낌이 반가워지기까지 나에겐 몇 달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 종일 토하고 어지럽고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만 있을 때는 모든 걸 그만하고 싶었다. 욕심 많은 내가 모든 것에 의욕을 잃었다. 화장실과 침대만을 오가던 어느 날, ‘도대체 귀여운 친구를 만드는 선택을 하면 뭐가 좋은지’ 알고 싶어졌다. 대책 없이 선택부터 하고 나서 찾아본ㅋㅋ 귀여운 친구의 장점.
먼저, 살고 싶으면서 떡볶이도 먹고 싶어 진다.
가끔 감당하지 못할 우울이 찾아올 때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돌아보면 죽고 싶을 만큼 힘들다는 마음에 가까운 것 같지만, 무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런 생각도 하던 내가 요즘 귀여운 생명의 안부를 수시로 궁금해한다. 살아 있는지, 손가락 발가락은 자라고 있는지, 어디 안 좋은 곳은 없는지 궁금하다. 건강하게 잘 크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괜히 기분이 좋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아가도 똑같이 소중한 생명인데 나란 생명에게 박하게 구는구나.’ 새삼 어디 아픈 곳 없이 건강하게 크고(?) 있는 내가 대견해졌다. 걱정할 곳 없이 건강하다는 건 당연한 게 아니라 굉장히 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아이였을 때 이후로 아이를 볼 일이 거의 없어서일까. ‘인간’을 떠올리면 성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목을 가누지 못하는 신생아, 기어 다니는 아기,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울어버리는 어린이.. 이런 모습은 떠오르지 않는다. 뚝이를 키워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나서야 그 모습들을 상상한다.
눈 앞의 모든 것들을 물고 빨다가, 몸을 뒤집고, 걸음마를 떼고, 말을 하고, 삐뚤빼뚤 글씨를 쓰며 커가는 모습들. 그러다 언젠가 학교라는 곳에 들어가고, 학교 앞 간식을 사 먹고, 친구들에게 잘 보이려 애쓰고, 거울 속 내 몸에 불만을 가지기도 하고, 무언가를 열심히 꿈꾸기도 하다가 언젠가 홀로 서게 될 먼 미래를 그려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나란 존재를 키웠을 나의 엄마 아빠를 떠올린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마치 혼자 큰 것처럼 굴었던 20대의 나를 귀여운 눈으로 봐주셨을 두 사람을 떠올린다. 십수 년 간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며 자랐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말, 손길, 눈빛이 내 어딘가에 있다. 지금의 나는 지금 경험하는 것들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 뻔한 사실을 나는 자주 잊고 산다.
‘뚝이를 어떻게 키우면 좋을까’ 상상하다 ‘나는 어떻게 커왔나’, ‘한 인간은 어떻게 크나’ 생각해보게 된다. 이런 고민들이 앞으로 내가 인간의 더 많은 모습을 품게 해 주기를.
‘지금’의 ‘나’에 집중하는 것이 지난 몇 년, 내 삶의 화두였다. 회사에서 하는 일들도 그 화두와 관련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 가지 화두를 오래 붙들고 있어서인지 ‘이제는 나라는 경계를 넘어 더 넓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이때쯤 뚝이를 만나 여러모로 다행이다. 덕분에 다음 세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고민들이 나이 들어도 나를 ‘지금’에 살게 만들어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