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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희 Feb 16. 2021

모성애는 없습니다만.

1.
“요즘 할머니 껌딱지인 아이가 많아서 문제래. 엄마와의 애착 관계가 형성되지 않아서 그렇대. 엄마가 퇴근하면 반겨주는 게 아니라 할머니가 가야 할 시간이라고 울고 불고 난리라고 하네.”

“좋은데? 그럼 할머니가 못 가실 거 아니야(웃음)”

2.
“자기(존리) 태어나고 1년 동안 할머니 손에 컸다고 했지? 어머님은 아버님이랑 미국 가시고. 부럽다. 나도 어머님께서 1년 딱 키워주시면 좋겠다.”

“막상 아가 낳고 눈으로 보면 그런 생각 안 들걸?”

"난 너무 좋을 것 같은데"

3.
“나는 애 잘 품어주고 잘 낳을 테니까 키우는 건 자기가 해야 돼. 자기가 예전부터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어서 훨씬 나보다 잘 키울 것 같아.”



가끔 존리는 나의 모성애를 지극히 걱정한다. 아마도 일상 속에서 내가 한 말들이 쌓여 그런 걱정 덩어리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날것 그대로의 내 생각은 존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왜, 어떤 포인트에서 불안해지는 걸까? 본인 혼자 아이를 키우게 될까 봐? 아이가 엄마 사랑을 못 받고 자랄까 봐?

근데 열 달 동안 몸 상해가며 오롯이 아가를 품어 내고 있는 나를 의심하는 거라면, 도대체 내가 본능적으로 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은 모성애가 아니라 무엇이란 말인가.

갑자기 ‘에라이 모성애가 뭔지는 모르겠고 성애는 내가 잘 알지’라는 생각이 들어 성애의 뜻을 검색해봤다.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성적 본능에 의한 애욕. 이 뜻에 대해서는 존리와 내가 상상하는 그림이 비슷하겠다 싶었는데, 그 순간 '이거다' 싶었다. 성애는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것. 그렇다면 모성애는 엄마와 아이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 사랑이 뭔지는 당사자인 엄마와 아이만이 느끼고 정할 수 있는 거다. 이 감정에서 남편, 아빠, 할머니, 친구 모두 제 3자다.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사랑 나아가 키스, 섹스 등 그 성애의 모습에 대해 제 3자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무의미하듯 엄마와 아이 사이의 사랑에 대해서도 사실은 정해진 것이 없다. 누군가 그 모양을 정할 수 있다 믿고 정하려 드는 것뿐.
 
‘부성애’보다 ‘모성애’의 모습에 왜 이렇게 많은 숟가락이 얹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 숟가락에 가운데 손가락을 들고 싶다. 아이를 가지는 것 자체가 두려웠던 때의 나는 그 숟가락들에 지레 겁을 먹었던 것 같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받는 수많은 요구들, 해야 할 숙제들. 주로 나를 죽이고,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하고, 고군분투하고, 자식이 나중에 생각만 해도 눈물 나는 존재가 되는 것. 나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게 두려웠다. 성인군자가 될 자신이 없었다.

곧 태어날 아이를 품은 지금, 가장 자주 하는 생각은 ‘지금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눈을 뜨면 손가락 마디마디가 구부리기 힘들 만큼 아프고 히터를 세게 튼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끼고 출근하는 길에 숨이 턱턱 막혀도, 혹시 아이가 안 움직이는 건 아닐지 딱딱해진 배에 가만히 손을 대보고 하루에도 몇 번씩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는 사람이 나다. 그 정도면 충분히 엄마답고 충분히 아가를 사랑하고 있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다.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요구받는 것들보다 내가 느끼는 이 마음이 더 진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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