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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미성 Sep 27. 2016

세상을 마주하는 어떤 감각

볼 오 방 Vol- au- vent 과 수플레 Soufflé

짙은 구름이 몰려와 어둠이 깔리고, 하늘이 낮아졌다. 곧 비가 올 모양이다. 장우산을 한 손에 든 걸음이 빨라진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매연을 뿜어대는 자동차 행렬과 인파로 뒤덮인 대로를 뒤로하고 서둘러 방향을 튼다. 주택가로 이어지는 작은 길로 들어서자마자 한적한 여유가 찾아든다. 저 멀리 길목의 끝에 목적지가 보인다. 흰 셔츠에 검은색 조끼를 입은 낯익은 서버 아저씨가 테라스에 세팅된 테이블들을 점검하고 있다. 그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서둘러 들어간다. 흰색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들 위에는 식당의 로고가 박힌 접시들과 은색 식기와 와인잔들이 세팅되어 있다. 반가움과 안도감에 조금씩 걸음이 빨라진다. 참 오랜만에, 다시, 이곳에 왔다.

저녁 7시 30분에 한 명의 식사를 예약하면 2인용 테이블이 촘촘히 붙어있는 홀의 조용한 안쪽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8시가 넘어가면서 속속들이 도착하는 사람들을 비밀스럽게 구경하고 점점 흥겨워지는 식당 전체의 분위기를 조용히 관망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자리다. 자리에 앉자 서버 아저씨는 1미터도 넘는 커다란 칠판 하나와 그 절반쯤 되는 작은 칠판을 가져와 잘 보이도록 주변 의자와 바닥에 기대어 놓아준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저녁 메뉴와 10여 년째 변하지 않는 스테이크 메뉴다. 그리고 와인 셀렉션이 담긴 메뉴판을 가져다준다. 사실 무엇을 먹어야 할지는 이미 알고 있다. 계절에 따라 주문해야 할 전식 요리만 바뀔 뿐이다. 지난번에는 봄에 와서 아스파라거스 요리를 먹었었다. 특별히 귀한 재료가 없는 여름엔 올리브유, 레몬에 절인 청어요리를 찐 감자와 함께 먹었을 것이다. 버섯을 좋아하는 내게 가을은 풍요로운 계절이다. 한 해 중 딱 세 달 동안만, 그것도 인공재배가 되지 않아 귀하다는 지롤을 먹을 수 있다. 은행잎처럼 노랗고 기다란 지롤은 그 자체의 맛을 살리기 위해 소금 간과 파슬리만 넣고 센 불에 살짝 볶아내서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 버섯 특유의 땅의 맛, 나무 그늘 아래에서 한 평생을 보낸 식물만이 내줄 수 있는 어둡지만 강렬한 음지의 맛과 샛노란 지롤 특유의 색감, 입안을 감싸주는 부드러움에 취해 금세 한 접시를 비운다. 


외국 생활이 길어지면서 초가을은 개인적으로 한 해 중 가장 많은 의미를 갖는 계절이 되었다. 더위가 걷히고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면 느닷없이 찾아오는 이별의 기억들로 마음이 스산해진다. 이 찬바람은 이제 다시 일어서서 또 한 번 나아갈 때라고, 긴장하고 마음을 다잡으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여름 바캉스 동안 그리웠던 가족을 만나고, 놀러 온 친구를 만나며 마음을 놓았다가 가을이 되면 눈물바람의 이별을 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마음을 추스르던 습관 때문이다. 바캉스를 떠났던 사람들이 아직 채 돌아오지 않은 텅 빈 도시의 한가운데 다시 홀로 된 이방인으로 서 있으면, 마음을 아무리 다잡아도 쓸쓸해진다.



볼 오 방, 불어로 Vol au vent, « 바람에 날아간다 » 는 뜻이다. 이 식당에 우연히 처음 들어왔던 날, 이 이름에 반해 어떤 요리 인지도 모르면서 주문했었다. 비상, 날아가다는 뜻의 vol이라는 단어에서 며칠 전 공항에서의 작별이 떠올랐고, 바람에 날아간다니 어딘가 낭만적인 지점이 있는 잔잔한 요리가 아닐까 기대했었다. 하지만 요리가 나오는 순간 그것은 나의 상상이었을 뿐임을 바로 깨달았다. 샐러드만큼은 아니어도 해산물 정도로는 가벼울 줄 알았던 요리는 그 반대였다. 

요리는 그냥 접시 위에 담긴 것이 아니라 원통 모양으로 만든 수 십 겹의 페스트리 빵 속에 담겨있었고, 그 안엔 버터와 마늘의 크림소스와 함께 버섯과 요리한 닭 가슴살, 내장 등이 들어있었다. 당시엔 송아지 췌장, 닭 가슴살 정도밖에 인지하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그 요리에 들어가는 가장 유명한 재료는 닭 벼슬이었다. 아니 그 쫄깃쫄깃한 식감이  닭 벼슬이었다는 말인가, 알았다면 못 먹었을 텐데 생각하며 뒤늦게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모르고 허겁지겁 한 그릇을 다 비웠었는데, 그러고 나니 날아가기는커녕 일어나 걸어가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 바람에 날아간다 »고 했던 것은 이 요리를 감싸고 있는 수십 겹의 페스트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맛 만은 그때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신세계였다. 세상에 이런 음식이 있다니, 그 내장요리가 그렇게 비리지 않은 고소한 맛을 낼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고, 크림소스와 페스트리, 버섯이 함께 어우러지는 프랑스 요리 특유의 깊은 감칠맛도 처음이었다.


파리에 처음 올라와 더듬거리는 불어로 교수 면접을 보고, 수 십 장의 서류를 들고 경시청에 가 신경질적이고 까다로운 담당 직원의 비위를 맞추며 체류증을 갱신하고, 내가 외국인이라고 무시하는 게 아닐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의심하며 지내던 시절이었다. « 프랑스적인 삶 » 은 고사하고, 프랑스라는 나라에 대한 감각 자체가 사라지고 없었던 시절, 지구 반대편에서 꿈꾸던 자유와 낭만의 나라는 온데간데없고, 외로움과 두려움만 가득했던 시절이었다. 프랑스의 문화는 다가올 듯하다가 멀어졌던 여고시절 어느 짝사랑의 추억처럼 실체 없는 것이었다. 이 낭만적인 이름의 놀라운 요리는 내 생애 처음, 육체의 감각으로 직접 경험한« 프랑스 »의 존재였다. « 프랑스의 맛 »을 이야기하라면, 나는 이 볼 오 방을 말하겠다. 


볼 오 방을 먹고 나면 너무 배가 불러 더 이상의 식욕은 사라지지만, 그래도 이 식당에서의 식사를 여기에서 끝내는 것은 길 건너에 불이 났다 하더라도 신중히 생각해 볼 일이다. 평소 단 음식을 즐기지 않아 웬만한 식사는 본식 후에 커피로 끝내는 편이지만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나의 인생 디저트가 이 곳에 있기 때문이다. 

수플레는 불어로 Soufflé, 부풀어 올랐다는 뜻이다. 넣는 재료에 따라 전식 요리도 될 수 있고 달콤한 디저트가 되기도 한다. 디저트의 경우, 달걀흰자 거품에 밀가루와 버터, 커스터드 크림 등을 오븐에 넣고 구워낸다. 이 식당의 경우엔 오렌지 향이 감미롭게 풍기는 리큐어, 그랑 마르니에를 넣어 상큼함을 더한다. 

그릇 위로 부풀어 오른 평범한 빵의 모습이 다른 디저트들에 비하면 소박하고 단조롭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플레는 생각보다 흔치 않은, 아무 식당에서나 먹을 수는 없는 디저트이기도 하다. 오븐에서 막 꺼냈을 때 마구 부풀어 오를 수 있도록 모든 조리 조건이 정확히 맞아떨어져야 하고, 무엇보다 미리 대량으로 만들어놓을 수 없기 때문에 식당의 디저트로는 흔치 않은 편이다. 


나는 달콤한 공기를 몸에 한껏 불어넣어 마구 부풀어 오른 이 공갈빵의 자태에서 매번 한없는 다정함을 느낀다. 마치 « 네게  향기로운 달콤함을 전해주려고 최선을 다해 온 몸으로 힘을 주고 있어 »라고 말하며 오븐에서 지금 막 달려온 것 같은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부풀어 오른 따뜻한 상태에서 서빙되는 이 수플레는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훈훈해진다. 모락모락 뜨거운 김이 오를 때 한 숟가락을 떠먹으면 커스터드 크림의 소박한 달콤함과 오렌지 향, 입안 가득 메우는 부드럽고 촉촉한 빵의 따뜻함에 미소가 절로 베어 나온다. 


수플레를 한 입, 두 입 떠먹고 있다 보면, 눈 딱 감고 다시 한번 인생을 믿어보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마음을 죄고 온 몸을 꽁꽁 붙들어 놓았던 그 모든 아픈 일들이 순간 « 까짓 거, 별거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 아닐까? » 싶어 진다. 어쩌면 결국 인생은 이렇게 달콤한 것일 수도 있지, 그렇게 괜히 마음을 졸이며 시간 낭비할 필요 없지 않을까,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또 한 걸음 디뎌보자, 하게 된다. 예전에 힘들었던 시간이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니듯이, 이번 일도 씩 웃으면서 돌아볼 수 있는 그런 날이 언젠가 오겠지 믿으면서, 나의 미래는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을 거라고 다시 한번 최면을 걸고 싶어 진다.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는 철학자 미셸 옹프레 (Michel Onfray)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더 주요하게 사용하는 감각에 따라 그 존재의 질이 달라진다고 이야기했다. 이를 설명한 한 책에서 그는 브리야 사바랭의 유명한 경구, «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알려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소 » 를 패러디하여 이렇게 썼다.  

« 당신이 선호하는 것이 시각인지 후각인지 말해주오,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현실을 살고 있는지 알려주겠소 »

스스로를 돌아보고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에는 각자 터득한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것이다. 옹프레의 말처럼, 그 일에 사용되는 감각은 시각일 수도, 지각일 수도, 후각일 수도 있다. 내 경우엔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 수록 머리보다는 몸의 감각이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은 그 육체의 감각에 집중하며 알게 되는 것이 많다는 것, 시각과 논리와 이성이 아닌 직접적인 몸의 감각이 스스로와 더 깊게 조우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뿐만 아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일도 때로는 그렇다. 특히 미식문화가 역사적으로, 사회 전반적으로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프랑스와 같은 나라에서는 그 사회의 성격을 직관적으로 감각하게 하는 좋은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끔 이렇게 오랜 시간 집중해서 혼자 먹는 식사는 값지다.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않았던 « 나 »를 마주하고, 다른 방식으로 « 세상 »을마주하며 새로운 통찰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내내 몸의 감각을 깨우며 내 안에만 온전히 몰입했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문을 열고 나온 길 위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다고 해도 경쾌한 발걸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 눈 앞에 떨어진 바위쯤이야 가볍게 폴짝 뛰어 넘어가면 되지, 그렇게 이 길을 무사히 지나고 나면 다음 길의 모퉁이에서는 새소리가 들릴지도 몰라, 기대하게 되니까. 어쩌면 인생은 그렇게 진지하게 머리로만 생각할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1] La raison gourmande/ Michel Onfray/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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