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의 도시라는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지만, 사실 미술관에 자주 가지는 못하는 편이다. 전 세계 모든 직장인들이 그렇듯, 주중에는 출퇴근만으로도 정신이 없고, 늘 선택이 요구되는 주말의 남는 시간에는 매주의 개봉 영화 중 괜찮다는 작품을 찾아보느라,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느라 이틀이 훌쩍 지나가기 때문이다.
물론 다 핑계다. 정말 원한다면 주중에 하루씩 야간개장을 하는 미술관에 퇴근 후 잠시 다녀올 수도 있고, 회사 근처에 있는 그랑 팔레 미술관 정도는 점심을 거르고서라도 잠시 다녀올 수 있으니까. 주말에도 그렇다. 집에서 15분 거리에 퐁피두 현대미술관을 두고도 시간이 없어서 못 간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된다.
습관에서 멀어지니 일상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지 못하는 것뿐이다. 아주 오래전, 파리에서의 삶을 꿈꾸게 했던 것이 바로 이 미술관들이었음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얼마 전 우연히 본 한 짧은 영상물 때문이다. 배우로 더 유명한 멜라니 로랑이 연출하고, 프랑스 문화부가 제작한 단편영화 얘기다. 내용은 단순하다. 한 명 한 명의 일반인들이 눈을 가린 채 가이드를 따라가 예술 작품 앞에 서고, 눈을 떴을 때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을 기록한 것이다. 비단 미술 작품뿐 아니다. 누군가는 오페라 극장의 발레 공연을 무대 뒤에서 지켜보고, 누군가는 거리의 음악 연주를 그렇게 맞닥뜨린다.
http://www.dailymotion.com/video/x5erkju_paris-en-emotions-le-film-de-melanie-laurent_creation
좋은 작품 앞에서 일상의 흙먼지가 씻겨 내려가듯 눈이 맑아지고 지적으로 고양되는 기분, 집약적이고 압도적인 아름다움 앞에서 마음이 물결치던, 그 감동의 순간들이 영상을 보는 내내 떠올랐다. 그들이 보는 작품을 굳이 보지 않아도, 그들의 표정만 보아도 나도 덩달아 벅차올랐다.
이 영상 속에서 작품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평소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혹은 생계를 위한 노동에 치여, 익숙한 문화가 아니라서 미술관이나 공연장에 잘 가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다.
파리가 현재 전 세계 예술계의 흐름을 볼 수 있다는 문화의 중심지라고는 하지만 (물론 엄밀히 현재의 중심은 뉴욕 혹은 베를린이겠지만), 그 인프라를 누리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음을,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님을 문득 생각하게 된다. 결국 다른 도시에서처럼 파리에서도, 예술을 생각하고 경험하고 누리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계층인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이런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왔다. 우선 이런 영상을 제작한 것도 그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프랑스의 미술관이나 도서관, 문화행사장에는 다양한 요금제가 있어서 구직, 실업자, 최저 소득자 등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또한 저소득층 가정의 문화활동을 돕는 사회복지단체들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문화생활이란 앞서 얘기했듯, 돈의 문제보다는 습관의 문제가 아닐까? 미술관의 입장권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미술관에 가는 일 자체가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세상의 일이라 여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영상도 결국엔 영상 속의 사람들이 느낀 감동을 언젠가 느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가 될 것이니까.
이런 맥락에서 작년 깐느 영화제에서 황금 카메라 상을 받은 우다 베냐미나 Houda Benyamina 감독이 떠오른다. 황금 카메라상은 첫 작품에만 수여되는 일종의 신인상으로, 우다 베냐미나 감독은 "디바인스 Les Divines"라는 작품으로 이 상을 받았다.
영화는 이민자들이 많고, 실업률이 높으며, 마약과 폭력 등 범죄율이 높기로 악명 높은 파리 근교의 동네에 사는 한 여고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고생의 성장물이라고 하면 선댄스 영화제 풍의 아기자기한 파스텔톤 영화가 떠오르지만, 이 영화의 어떤 장면에도 그런 산뜻한 순간은 없다. 주어진 환경에서 성공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마약 딜러가 되는 작고 깡마른 여고생의 이야기가, 그녀가 어떻게 살아남고 절망하게 되는지의 과정이, 그야말로 날 것 그대로의 긴장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VT4YtWdK01M
작년 가을, 이 영화를 보면서 온 몸으로 느꼈던 강렬함을 잊을 수 없다. 첫 장면부터 펄펄 끓어오르는 에너지가 느껴졌으며, 영화는 내내 "우리는 당신들에게 할 말이 너무나 많다"라고 소리치고 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마치 마티유 카소비츠의 "증오"를 여성 버전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고, 타란티노의 초기 영화와 같은 에너지와 새로움을 느꼈다. 사회적으로는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첫 작품이다 보니 많은 단점들을 안고 있긴 하지만, 그 새로움에서 작년 한 해 개봉 영화 중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되었다.
우다 베냐미나 감독은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비슷한 과정으로 여러 번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다가 그만두고 미용기술 자격증을 따는 등 영화와는 아무 상관없는 시절을 보냈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중 어떤 계기로 문학과 영화에 매료되었고, 파리 근교의 어려운 환경에 있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 만들기 아뜰리에"에서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발전시켰다고 한다.
이토록 새로운 에너지로 파닥거리며 힘에 넘치는 젊은 영화가, 근 십 여 년동안 개인적이고, 미시적이며, 귀족적이고, 더 이상 새롭지 않아 지루하다고 지적되던 프랑스 영화계에 탄생했다. 그야말로 누구도 돌보지 않던 버려진 근교의 "지류"에서, 예술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온 한 미용사가 그 비좁은 프랑스 영화계의 가장 주목받는 신인 감독으로 단숨에 떠오른 것이다.
예술과는 상관없이, 생존만을 위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우다 베냐민 감독이 어떤 계기로 갑자기 "문학과 영화에 매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어릴 때부터 자기 안의 남다른 창조적 에너지를 자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매료될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진다고 해서 모두가 그녀처럼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그녀와 비슷한 상황의 청년들에게 자기 안의 어떤 것을 이렇게도 끄집어낼 수 있다는 희망, 가능성을 보여줄 수는 있을 것 같다. 창작자의 에너지란 결국, 꼭 하고 싶었던 어떤 말, 보여주고 싶었던 어떤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