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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미성 Oct 10. 2017

다시 일어서는 그대에게

어느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당신은 올해 서른 살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얼마 전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었고, 심신이 지쳐서 부모님이 계신 지방도시에 내려와 쉬고 있다고 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인생의 새 길을 준비하면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의 공부를 위해 프랑스 유학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작년에 출간된 저의 책을 읽었고, 프랑스에 대한 정보를 구할 수가 없는 상태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저에게 연락을 했다고 했지요. 


준비하고 계신다는 분야에 대해 문외한인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그저 인터넷으로 검색한 단편적인 정보들 뿐이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저는 무슨 이야기든 하고 싶었습니다. 

인생의 새로운 길목에 선 당신을 떠올리니 저의 서른 살이 자연스럽게 떠올라서요. 


저도, 인생의 길목에 섰던 몇 번의 기억이 있습니다.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다른 나라로  유학을 결심하던 때가 그랬고,  

이십 대를 모두 바쳤던 공부를 접고, 생활인으로 새 출발을 해야 했던 때가 그랬습니다.

그 기억들을 떠올리다가  문득 생각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몇 해 전,  서른 살이 조금 넘었을 때였습니다. 벌써 삼십 대인데 해 놓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고, 그로 인해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서 조급한 마음으로 살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멘토라 여기는 열 살 위의 한 인생 선배가 저에게 무심코 이런 말을 하더군요.

”지금 내가 미성 씨 나이라면 뭐든 해 볼 것 같은데요”   

당시 무슨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지, 저는 어떤 고민을 토로하고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말만은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이 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 앞이 확 트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지난 20대를 돌아보듯이, 언젠가 이 순간을 나는 또 돌아보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과  ‘내 눈에 이렇게 훌륭한 이 사람도 본인의 과거에 아쉬움과 후회를 갖고 있구나’ 하는 놀라움이 동시에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그 이야기를 썼습니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고 알려주고 싶어서요. 


당신은 힘들었던 하루의 끝에서 그 이야기를 보고 처음으로 웃음이 났다고 했지요. 

보수적인 지방도시의 분위기 속에서, 부모님의 결혼 걱정 속에서 기가 죽어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 왠지 잘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메일을 받고서 내내 생각이 많았어요. 

어쩌면 저는 “파리에 꼭 오세요, 인생이 바뀔 거예요” 같은 고무적인 말이나 파리 유학이 많은 것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마술 같은 이야기를 했어야 했을까요. 

유학을 준비하던 시기의 두려움과 외로움, 막막함이 떠올라서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지만,  유학 중간중간의 어려움과 자책감 또한 떠올라서 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답니다. 

하지만, 그 후로 오랫동안  당신의 메일을 떠올릴 때면 이상한 조바심이 내내 마음을 떠나지 않더군요. 

다른 건 몰라도 이 마음만은 꼭 보여주고 싶어서요. 


혹시 지금 어떤 길의 끝에 다다른 것 같나요. 

나름대로 공고하게 짜 놓은 그 어떤 계획서도 주변의 시선 앞에서는 한낱 허망한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 것 같나요. 

당신의  밤과 낮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이 말 만은 꼭 드리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당신의 두 다리로 단단하게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것. 

그리고 혼자서 새로운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 

시작은 막막하고 두려울지라도, 일단 길을 걷기 시작하면 또다시 “삶”이 구성될 거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서른 살은 그 어떤 경험도 아깝지 않은 나이라는 것.   

혹여 그 끝에 당신이 원하는 화려한 결말은 없을지라도 또 설령 후회하게 된다 하더라도, 괜찮다는 것. 

서른 살의 그 경험은 그 이후의 또 다른 시작에 풍족한 밑거름이 될 테니.


당신의 시작을 뜨겁게 지지하는 마음 하나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우리 서로 얼굴도 모르지만, 언젠가 서울의 거리에서, 파리의 길목에서 마주친다 해도 모르고 지나칠 사람들일 수 있지만요. 

당신의 온전한 독립을 마음 깊이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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