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을 너무 열심히해서
일 머리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남들보다 습득하는속도가 느린편이라(=이해력이 좀 딸림...) 뭘 배우면 자리로 돌아가서 혼자 생각하는 의자에서 배운 걸 다시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한 아이였다. 손발이 빠릿빠릿한 편도 아니여서 어떤 요청을 받으면 쿵-하면 짝! 하고 빨리빨리 결과물을 내놓는 스타일도 아니였다. 나는 좋은 인턴, 좋은 신입사원은 감은 아니였다.
또 논리가 좋아서 기획을 기똥차게 잘하는 것고 아니였고, 빵빵터지는 크리에이티브를 구현할 수 있는 '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다면 숫자라도 잘 봐야되는데 나는 뼛 속까지 문과다. 나는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역량은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아이였다.
그런데 엉덩이가 무거워서 앉아있는거 하나는 잘했다. 매일 우리층에서 가장 늦게까지 야근을 했었다. 그리고 그걸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었다. 바로 이게 내가 망한 가장 큰 이유이다.
왜? 인턴이, 신입사원이 열심히 야근하면 좋은 거 아니야?
아니. 절대 아니다. 제구력이 없는 투수에게 공을 주면 절대 9회말 까지 던질 수가 없고, 본인 체력의 리미트를 모르는 초딩들이 운동회 끝나고 몸살이 나서 앓아 눕는 것 처럼 나는 내 몸의 배터리가 몇 프로가 남은지도 모르고 그저 오래-열심히- 하며 나 스스로를 방전시켜버린거다. 말로만 듣던 번아웃을 경험한 것이다.
아! 단, 그런 사람은 있다. 가끔 주변을 보면 완전하게 그 일에 미치는 사람들. 특정분야에 완전하게 몰입하는 사람인데, 막 일이 너무 재밌고, 막 시도때도 없이 일 생각이 나고... 일 생각만 하면 막 두근두근-설레하는 사람들. 그래서 야근이 야근이 아닌 사람들, 야근이 하나도 안 힘든 사람들. 근데 난 그런 사람은 아니다...
그리스 크레테섬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득 난 왜 그렇게 열심히 야근을 했을까? 라는 의문이 든거다. 내가 왜 그렇게도 야근을 많이 했는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런 이유들이 있었다.
1. 진짜로 손이 느려서
2. 내일 일이 밀릴까봐 무서워서
3. 다 바쁜 것 같아서 못 물어봐서
4. 이거 다 못하겠다고 말 못해서
1. 진짜로 손이 느려서
이건 할 말이 없다. 진짜로 손이 느리다. 하지만 일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날 수록 숙련도가 쌓이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이 느렸다. 사실 1,2년차가 됐을 땐- 손이 느리다기보다는 리셋증후군이 좀 심했던 것 같다. 업계에서 흔히 말하는 '우라까이' 치는 걸 좀 힘들어했다. 우라까이는 기존의 것을 살짝 바꿔내는 것을 말하는데, 멍청하고 고지식한 나는 아이디어로 먹고사는 광고인이 그런 짓을 하면 월급받을 자격도 없다며- 항상 새하얀 빈 문서를 띄워댔다. (그러니 맨날 오래 걸릴 수 밖에...) 그 대나무처럼 꼿꼿하고 조선시대 선비같은 고결한 정신은 쓰나미같은 업무량에 부딪혀 얼마가지않아 개나 줘버려렸지만 말이다... 기존의 것을 잘 조합하는 것도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걸 그땐 몰랐다.
2. 내일 일이 밀릴까봐 무서워서
하루는 매일 같이 야근하는 것이 내 스스로의 문제인지, 진짜로 업무량이 너무 많아서 문제인지 테스트해보기 위해서 출근하자마자 딴 짓 하나도 안하고 일만 해봤다. 점심도 안 먹고 화장실도 안 가고 그렇게 앉아서 일만했는데 스케줄러에 적힌 마지막 일을 끝 마치고 나니 새벽 2시였다. 미친거다. 지금생각해보면 일이 일을 낳았다. 오늘 꼭 하지않아도 될 일까지 내 스스로가 일을 만들고, 또 하고, 또 만들고- 그러니 일이 끝이 안나는거다.
내가 회전문에 들어가서 엄청 빨리 회전문을 밀면 회전문도 엄청 빨리 돌아간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나도 뛰어야한다. 그런데 그냥 천천히 회전문을 밀면 나도 그 안에서 내 페이스 맞춰서 걸으면 된다. 나는 그것고 모르고 무조건 빨리 치는 게 좋은 거라 생각하고 회전문을 엄청나게 빨리 돌린거다. 내가 그 안에서 죽으라고 뛰는지는 모르고...
3. 다 바쁜 것 같아서 못물어봐서
이건 아직도 못 고친 고질병인데- 모르는 걸 잘 못물어봤다. 의외로 소심한 성격탓에 광고회사 그 전쟁터 같은 사무실에서 세상 바빠보이는 상사에게 '질문있습니다!' 하고 손을 드는 건 나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였다. 그런데 좀 혼날각오하고, 좀 싫은 소리를 들어도 그냥 물어보고 빨리가는 게 오히려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 팀에 방실방실 잘 웃는 인턴 한 명이 들어왔다. 그 인턴은 "대리님(빵긋) 이걸 잘 몰라서 그런데요(빵긋) 좀 알려주시면 안되요?(빵긋)"하고 방실방실 웃으며 대리님께 질문했다. 방금까지 광고주와의 통화로 엄청 빡쳐있던 대리님도 이내 웃으며, "뭔데? 가지고와봐." 하고 엄청 자세하게 봐주시는 거 아닌가... 그 빵실이 인턴을 보면서 난 왜 저러지 못했을까... 후회하기도 했었다.
4. 이거 다 못하겠다고 말 못해서
업무량이 적은 건 아니였다. 정말 바쁠 때는 분 단위로 메일을 주고받을 정도였으니까. 그럴 때면 국가대표 탁구선수 현정화에 빙의 된 사람처럼 탁구치듯 일을 쳐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대리도 안 된 사원 나부랭이(=나)에게 엄청나게 큰 프로젝트를 줄 정도로 생각 없는 회사,팀은 아니였다. 그래서였다. 그래서 말을 못했다. 다른 상사들이 5키로짜리 짐을 2개씩 들고 있었다면, 나는 1키로짜리 짐을 8개를 지고 있었다. 사실 남들과 비교했을 때 1키로짜리 짐은 너무나도 가벼운 짐이였고, 더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 상사들 앞에서 무겁다고- 못들겠다고- 엄살을 피울 순 없는 상황이었다. 더 이상 짐을 쥘 손, 그 짐을 들 힘도 없는데 그냥 등에 메고- 목에 걸고- 남들 따라 어기적 어기적 걸어가다 결국 혼자 꼬꾸라져버린거다.
당시에는 "이 망할 회사. 나만 일 시키네 ㅂㄷㅂㄷ" 했었다. 당당하게 "저 못하겠습니다!" 말하지도 못하고 찌질이처럼 속으로만 그랬다. 그런데 돌아보면 내가 조금만 더 영리하게 행동했으면 나도 이 정도까지 심한 번아웃을 경험하진 않았어도 됐었는데- 하는 것들이 있더라.
번아웃을 한번 경험하면 방전된 배터리처럼 일정기간 (기존보다 오래)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 시간동안은 켜지지도 않으니까. 그냥 꺼진 채로 있어야한다.
그러니까 나처럼 망하고 싶지 않으면 야근하지 말아야한다. 영리하게 굴어야한다. 근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도 남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나만 몰랐던 것 같은 쎄-한 느낌이 든다. 갑분쎄...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간다.
나는 일 머리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남들보다 습득하는속도도 느린편이라...(도돌이표)
일 머리 조차 학습해야하는 내 이번생은 망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