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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면 Feb 10. 2019

도움에 관한 고찰

타인의 도움을 죽어도 못 받는 그대에게

결국 도움을 받아버렸다.
다나킬 화산을 보러 가는 길. 해가 뜨기도 전, 어두운 화산 돌길을 걷다 깊은 구덩이에 오른발이 풍덩- 하고 빠져버렸다.


순식간이었다. 저릿한 통증과 함께 무릎까지 빠져버린 다리를 빼내며 어기적 일어나니, 그제야 내 주변을 에워싼 동행들의 걱정 어린 눈빛들이 보였다.

용암이 녹아내린 화산지대라 지반이 약한 이 곳.


민망이 휘몰아쳐 얼른 일어섰다. 경민 오빠가 내가 놓쳐버린 침낭을 들고 앞에 서있다. 내 동행 말고도 다른 그룹에 속한 외국인 친구들도 가던 길을 멈춰서 나를 걱정해준다. 괜찮냐고.

내가 빠진 구덩이 부근은 아무래도 지반이 약해 보여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무릎을 툭툭 털고 다시 길을 걸어갔다. 어느새 현수는 내가 앞이 잘 보이도록 핸드폰 플래시를 켜주며 내 앞으로 츤데레처럼 걸어간다. 괜히 현수한테 혼날까 봐 좀 쫄렸다.

겨우 구석 자리에 앉아 다리를 살피니 오른쪽 무릎에 생채기가 생겼다. 무릎이 시큰하니 멍도 들것 같다. 그런 나를 보던 창균이는 간호사 누나에게 받았다는 일회용 소독 면봉과 거즈를 건네준다.

"누나, 괜찮아?"하고 물어오는 창균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혼자서 구급처치(?)를 해보겠다고 찢어진 청바지 사이로 보이는 상처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으니, 한 외국인이 다가와 가방을 열더니 지퍼백에서 소독제와 연고 그리고 밴드를 준다. 괜찮냐고 묻는 것은 잊지 않은 채.

불과 5분 동안 함께한 동행들에게, 얼굴도 모르는 외국인에게 예상치 못하게- 의도치 않게 도움을 받아버렸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연신 고개를 꾸벅이며 고맙다고 말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가던 길을 뒤돌아 와 밴드 몇 개를 더 챙겨주는 외국인에게 그저 고맙다고만 말할 수 있었다.


상처때문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일출을 기다리는 나. 꼴이 말이 아니다.


동행들 덕분에 응급처치와 심신의 안정을 얻은 채, 일출을 기다리고 있으니- 도움이 뭔가, 호의는 대체 뭔가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많이 고마웠나 보다. 그리고는 나는 과연 내 동행들과 같은 상황에 처하면 두발 벗고 나서서 내가 가진 약을 걱정스레 나눠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도움이라는 것은 받을 수 있는 시기와 타이밍을 내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에티오피아 화산에 구덩이에 새벽 5시에 빠져 무릎에 생채기가 날 거란 걸, 내가 매일같이 이고 지고 다니던 연고와 대일밴드 하나 이 곳에 가져오지 못할 거란 걸, 나는 몰랐다.

화산에서 나를 구해준 나의 소중한 은인들.


앞으로 나는 내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는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고 도움을 "잘" 받아야 될 것이다. 반대로 내가 생각한 도움과 호의도 내가 주고 싶을 때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주면 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이 너무나 흉흉해서 도움을 주고 싶어도 도움을 도움을 줄 수 없는 세상이다. 내 도움이 혹시나 해가 되지 않을까? 또는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다가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지 않을까? 고민들을 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그럴 때, 그냥 나의 침낭을 들어준, 후레시를 비춰준, 구급약을 꺼내 준 그들을 생각하며- 그냥, (도움을 예상 못한) 그들에게 도움을 주면 된다.

받기만 하는 것은 죽어도 안 되는 성격이라서- 꼭 누군가가 그때가 오면 나도 그들처럼 생각 않고 그것을 주면 된다. 그거면 된다.

무릎 다 깨지고 얻은 다나킬 화산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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