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정리하는 중입니다.
노트북을 열어 오래 묵어 기억도 안 나는 습작들을 지우고 순간마다 남겨놓은 의미 없는(아마도 그때는 의미 있었을) 단상이 담긴 메모 파일을 몽땅 지웠습니다.
사진도 지웠습니다.
습관적으로 찍어놓은 무신경한 핸드폰 사진들을 모조리 지워버렸구요. (뭐가 이렇게 많던지)
쇼핑몰 포인트에 눈이 멀어 찍어둔 후기 사진용 제품 사진들이 대부분이더군요.
여행지에서 혼자 찍은 셀카들을 많이 지웠습니다. 풍경이 예뻐서 풍경을 배경으로 나를 찍었는데, 내가 안 예뻐서 그냥 지웠습니다. 풍경만 찍을 것을 괜히 예쁜 풍경에 나를 끼얹었을까.
핸드폰하고 노트북은 얼추 정리가 되었고, 이젠 온라인 클라우드 차례입니다.
저장 공간이 부족하다고 자꾸 추가결제를 하라는데, 뭐가 뭔지 모르겠어서 일단 지우기로 합니다. 꼬박 몇 시간이 걸렸지요. 아, 시작하지 말걸 후회를 합니다.
잊고 있던 사진들이 와장창 쏟아집니다. 불필요한 사진들을 몽땅 지웁니다.
시간 순서에 따라 과거로 과거로 스크롤을 내리다보니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이 많아요. 아, 내가 여길 갔었나? 여긴 어디야? 하면서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지금은 연이 끊긴 사람들이 사진 속에서 나와 함께 웃고 있습니다. 문득 한 순간 되게 미워했던 마음도 떠오르고, 그래도 좋았다고 말해주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사진을 지우려다 그냥 두었습니다. 웃고 있으니까. 좋았으니까. 물론 다시 열어볼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흘러간 것은 그런 것이니까요.
그러다가 재밌는 사진을 발견했어요.
대략 10년 쯤 된 것 같은데요.
겨울, 눈이 올락말락 하던 날, 낡은 자동차에 쌀, 김치, 라면, 생수와 노트북을 싣고 근처 휴양림으로 갔습니다.
비수기였고, 평일이었으니 손님은 하나도 없었죠.
시에서 운영하는 시설이라 나름 가성비 좋고, 훌륭한 숙소였습니다.
제가 도착하자 시설 담당자는(아마도 공무원?)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치였습니다.
웬 여자애가 (제가 보기보다 많이 동안이었습니다.) 일행도 없이 산속 휴양림을 찾아왔으니.
한 3박 4일 정도 처박혀서 글을 쓰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원래 예약했던 방은 제일 끝방이었는데 눈이 오면 차가 헛돌아 위험하다면서 시설 담당자가 아래쪽 방을 권했습니다. 사람이 없었는데 하루는 옆 방에서 고기를 굽고 놀더군요.
그렇지. 사람들은 놀러 오는 곳에 나는 숨으러 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휴양림에 처박혀서 원고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결과는 대폭망.
......하하하하.....쓰바.
이런게 운명의 데스티니? 뭐 그런 건가 봅니다. 비슷한 마음을 먹었을때 그 때의 사진들이 튀어나왔습니다.
산속으로 들어가진 않을 겁니다.
다만, 얼마간은 그때처럼 오롯이 혼자 남을 생각입니다.
그때는 3박 4일이었지만, 이번에는 3개월 쯤 되지 않을까 합니다.
요 얼마간 굳이 떠벌릴 수 없는, 부끄러운 현실을 눈 똑바로 뜨고 마주했습니다.
이꼴 저꼴 다 보기 싫었고, 무엇보다 내 꼴이 싫었지만, 그래도 나 아니면 누가 나를 봐주나 싶어서 나만 보기로 합니다. 그때처럼 대폭망 엔딩은 아닐것이라 믿습니다.
지울 것은 지웠고, 흘릴 것들은 흘리는 중입니다.
저도 흐르고 흐르겠지만, 어느 순간마다 손을 휘저어 물길의 방향을 틀고 제 길을 가볼까 합니다.
끝내 이 공간을 지우지 못해, 그냥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