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mazing Grace YJ Jul 16. 2023

사물의 추억 2

카세트테이프


  초등학교 시절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나만의 테이프 진열장을 갖는 것이었다. 고등학생 사촌언니의 책장 한 켠에 나열된 테이프들은 막 대중가요에 눈을 뜬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동요가 아닌 가요를 듣고 테이프를 수집하는 것이 또래와 다른 고차원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의 첫 카세트테이프는 ‘015B’ 3집이다. 이 테이프 하나를 사기 위해 동생과 함께 몇 달 용돈을 모아 동네 음악사에 갔다. 주인아저씨에게 테이프를 주문하고, 며칠 뒤 그것을 받았을 때의 떨림이란! 그리고 테이프를 재생했을 때의 기쁨이란! 지금 생각하면 별 일 아닌 일이 그때 나에게는 큰 이벤트였다. 아! 그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던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어마 무시한 가수라는 것은 훗날 알게 된 사실이다.


  첫 테이프의 추억을 뒤로하고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내 책장도 어느덧 사촌언니의 책장 한 켠처럼 되었다. 테이프를 사고 싶으면 살 수 있을 정도의 용돈도 생겼고, 친구들끼리 생일선물로 테이프를 교환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음악시간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소개한 선생님 덕분에 즐거웠다. 어느 수업시간 ‘Savage Garden(새비지 가든)’ 의 ‘Truly Madly Deeply’를 틀어줬다. 노래가 너무 좋아서 다시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테이프나 CD를 구매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다시 듣기 위해서 테이프를 꼭 사야 했다.
학원을 갔다 집으로 오는 길, 친구에게 스치듯이 갖고 싶은 테이프가 생겼다고 말했다. 지나간 말을 어찌 기억했는지 다음날 친구가 집에 테이프가 있다며 갖다 주겠노라 한다. 그런데 누나 것을 몰래 빼와야 하니 며칠 기다리란다. 테이프를 손에 넣게 되어 기쁘고, 그가 스쳐간 내 말을 기억해 준 것 또한 큰 기쁨이지만 ‘아니 굳이 뭘 그런 걸...’ 하는 시크함으로 말을 흐렸다. 지금 같으면 온갖 칭찬과 미사여구를 붙여 고맙다고 했겠지만, 당시 나는 표현에 인색한 여고생이었다.

  며칠 뒤 저녁시간 우리 집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나 A!”
“응 무슨 일이야?”
“자 이거! 맞지? 간다.”


  내 손에 테이프를 건네고 재빨리 돌아선 녀석의 뒤통수를 보며 나는 한참을 웃었다. 그가 건넨 것은 내가 원한 ‘Savage Garden’의 테이프가 아니라 ‘Secret Garden(시크릿 가든)’의 테이프였기 때문이다. 같은 ‘Garden’이긴 했지만, 많이 다른 ‘Garden’이었다.


  다음 날,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꾹 누르면서 내가 원하는 건 ‘Secret Garden’이 아니라 ‘Savage Garden’이라고 돌려줬다. 그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그게 그거지 뭐! 그냥 들어!’하면서 화를 냈다. 대꾸하지 않으면 지는 느낌이 들어 나도 같이 화를 냈다.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될 것을.
  해프닝이 일어난 며칠 후, 집으로 오는 길에 녀석이 머쓱해하며 무언가 툭 건넨다. 그건 바로 내가 원하던 ‘Savage Garden’의 테이프였다. 그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볼멘소리로 말한다. 올해 아니 내년 생일선물까지 이걸로 퉁칠 거라고. 삐죽거리며 건넨 말이었지만 그래도 기뻤다. 나는 그때, 테이프를 가질 수 있어서 기뻤던 것일까? 아니면 그가 내 말을 기억해 줘서 기뻤던 것일까? 나도 잘 모르는 마음을 붙잡은 채 고맙다 말하고 돌아섰다.


  집으로 돌아와 떨리는 마음으로 테이프의 포장 비닐을 조심스레 뜯었다. 그리고 그 테이프를 워크맨에 넣고, 이어폰을 낀다. 3번 트랙에 있는 ‘Truly Madly Deeply’를 찾아 빨리 감기(FF)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가사집을 펼친다.


I want to stand with you on a mountain.
그대와 함께 산을 오르고 싶다.
I want to bathe with you in the sea.
그대와 함께 바다를 헤엄치고 싶다.
I want to lay like this forever.
그대와 함께 이렇게 영원히 누워있고 싶다.
Until the sky falls down on me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Savage Garden, Truly Madly Deeply, 1997)


  얼마 전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소중했던 테이프는 이미 없어진 지 오래. 기억을 더듬으며 휴대폰 음악 재생 앱을 열어 음악을 검색한다. 이젠 3번 트랙으로 넘기기 위해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를 필요가 없다. 테이프를 갖기 위해 사흘 나흘 기다렸던 설렘의 시간 또한 초단위로 짧아졌다. 이어폰에서 ‘Truly Madly Deeply’가 흘러나온다. 테이프 케이스 안, 고이 접혀있던 가사집처럼 내 추억 속 담겨있던 설렘을 조심스레 꺼내본다. 그 설렘이 아직 늘어지지 않고 생생하게 느껴져 참 다행이다. 다행이다.



*이 글은 2w 매거진 3호에 실린 글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사물의 추억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