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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Mar 24. 2023

하버드 도서관에서 꿀잠을?

책상에 누워서 자는 건 한국사람이 최고


봄 학기의 메인 수업이었던 통계 중간고사를 오늘 마쳤다. 90분 동안 수업에 직접 들어가서 펜으로 직접 푸는 올드스쿨 스타일의 시험이었다. 


지난 몇 주간 이 시험만을 바라보며 달려와서 며칠 동안 잠을 줄여가며 커피와 함께 살았다. 하필이면 시험도 아침 8시라서 새벽부터 일어나서 학교를 가야 했다. 


90분의 논스톱 시험을 마치고 해롱거리는 머리를 이끌고 하버드 케네디 스쿨 수업을 들으러 왔다. 수업 시간에는 온통 "이 수업이 끝나면 어디서 짱박혀서 자야겠다."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수업을 마치고 배에 아무거나 채워 넣고 도서관으로 왔다. 케네디 스쿨 도서관에서 가장 구석자리에 앉아서 한국 사람이 제일 잘하는 책상에 엎드려 자는 기술로 1시간을 잤다. 


친구가 케네디 스쿨 도서관에 간다고 하니 거기에 왜 가냐고 해서 자러 간다고 하니 흠칫 놀랐다. 유럽 친구에겐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도서관에 가서 자는 이유가 조용하고 책상이 있다는 거니까. 책상에서 엎드려 자는 게 얼마나 꿀인지. 나는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의 상당 부분을 책상에서 자면서 컸으니. 


통계 시험으로 돌아와보자. 영어로는 Applied Regression Analysis라는 수업인데 중급 회귀분석 정도라 번역이 가능하겠다. 우리 프로그램에서 나만 이 수업을 "굳이"듣는데 그러는 이유는 이걸 들어야 고급 통계 수업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끝판으로 가기 위해 거쳐갈 수밖에 없는 험난한 과정이다. 


그 어느 통계 수업도 쉬운 게 없다. 일단 수업도 아침 8시에 시작하고, 통계 언어라는 게 영어로 수업을 하지만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 같다. 통계를 한글로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모든 단어들이 생경하고, 수학 용어들도 익숙지 않은 것이 현실. 무엇보다 대형 강의인데 대부분 바이오 통계나 역학을 전공해서 이런 것들이 익숙해 보이는 친구가 대부분이었다. 


매주 있는 조교의 오피스 아워에 가서 정말 기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했다.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매주 조교를 따라다니고, 모르는 문제들을 메일로 집요하게 물어보며 지난 몇 주를 보냈다. 조교는 아무도 오지 않는 오피스 아워에 항상 오는 단골인 내가 지칠 만도 한데 친절하게 답해주었고, 시험이 끝나고 나한테 오더니 잘했지?라고 물어봐 주는 센스도 보여줬다. 


요즘 친구들(?)은 방대한 수업 자료를 컴퓨터나 태블릿으로 보면서 공부하지만 난 올드스쿨이라 수업 슬라이드, 숙제, 랩 과제 등 모두 출력을 했다. 아직 중간고사인데 족히 200장은 넘는 거 같다. 지구야 미안해 ㅠㅠ 그걸 하나씩 줄 치며 동그라미를 치며 형광펜으로 도배를 하며 수능 공부하듯이 했다. 등하교 시간에는 수업 영상을 소리로 들으며 언어 공부하듯이 들었고, ChatGPT에 모르는 게 있으면 질문해서 채팅으로 개인 과외(?) 하면서 지난 몇 주를 보냈다. 


그렇다고 통계를 잘 알겠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시험도 잘 본지도 사실 모른다. 그런데 시험을 끝나고 나서 마음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뿌듯함과 성취감이 있었다. 아마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정말로 최선을 다했고, 이 나이에도 주어진 과제를 말 그래도 성실하게 꾀를 안 부리고 다 해냈다는 느낌에서 나오는 것 같다. 


일을 하다 보면 사실 최선을 다하는 경험보다는 최고의 결과를 향해 달리는 일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도 최고의 결과로 포장해서 만드는 것도 하나의 스킬이고, 뻔뻔하게 최고인척하고 나의 최선을 숨기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다. 성과를 증명하기 어려운 국제 개발 분야에서는 특히나 그런 일들이 더 많고, 어떻게 발표를 잘하고, 글로 적어내는 것이 성과를 좌지우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는 게 이 업계의 현실이기도 하다. 


나에게 스스로 물어보았다. 이렇게 열심히 무언가에 최선을 다해서 꾀를 부리지 않고, 오로지 내가 부은 시간과 노력만큼 결과를 받아든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다른 모든 수업들보다도 통계 수업은 그런 면에서 정직함으로 승부를 해야 하는 그런 배틀인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통계 수업을 싫어하는 걸지도 모른다. 요령이 통하지 않는. 시간을 때려부어서 머리에 통계 근육을 만들어야 시험장에서 백지에 통계라는 무게를 들고나올 수 있기 때문에. 


90분의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새로운 나를 보았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내가 배우고 싶어서 불편한 통계의 굴에 들어가서 그들의 언어에 맞추어 춤을 추고 나온 기분이었다. "평생 연구하고 실험하고 논문만 쓸 거 아닌데 이렇게까지 통계 트랙을 따라갈 필요가 있어?"라고 말하는 내면의 목소리에 항상 "이번에는 제대로 부딪혀보고 싶고, 학자들만 읽고, 토론하는 그 저널들의 수많은 별표와 숫자들을 쉬운 언어로 풀어낼 거야. 그들의 지식을 우리의 상식으로 만들고 싶어."라고 스스로에게 대답했었다. 


그 호기로운 대답이 말로만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시작인데 피하지 않고 부딪힌 나에게 스스로 칭찬해 주고 싶은 하루다. 박사를 와서는 사실 도서관에서 잘만큼 여유가 있었던 적이 많이 없는데, 오늘은 통으로 시간이 나서 오랜만에 이마에 빨간색 자국이 지워지기 전에 빨리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나이 40이 꺾인 지금 이 시점에 공부에만 올인할 수 있는 순간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그래서 주어진 (제한된) 시간에 최고를 위해 달리기보다 먼저 최선을 다하는 진실한 나와 조우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여기는 하버드 대학 메인 도서관인 와이드너 도서관.
오늘 나의 낮잠 장소를 제공해준 하버드 케네디 스쿨 도서관 구석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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