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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Nov 25. 2023

이제야 써보는 하버드 합격기

내가 뭐라고 하버드 박사를

 "요놈. 나중에 하버드 가는 거 아냐?" 


어렸을 때 이런 얘기를 들어본 기억이 있다. 나에게 한 얘기는 아니지만 어린 자녀들의 영특함에 감탄할 때 어른들이 하던 농담 같은 소리. 하버드는 대학입시의 끝판왕이니 자식들을 위해 그냥 던져보는 어른들의 바람 같은 것 아니었을까.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하버드는 흡사 유니콘 같은 존재였다. 존재는 하는 것 같지만 나는 본 적도 없고, 경험해 본 적도 없는, 뭐 딱히 나와 상관이 없는. 당장 대학도 재수를 해서 간 나에게 하버드는 그냥 박물관에 존재하는 모나리자 그림처럼 멀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 



그렇게 멀던 그 이름이 한층 가까워진 것은 플래쳐에서 석사를 할 때이다. 플래쳐 학교 설립도 하버드와 공동으로 시작을 해서 다른 어느 학교보다 교류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었고, 플래쳐에서 석사를 할 때 하버드 수업을 2개 들으면서 교육대학원, 보건대학원 수업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렇게 10년의 시간이 흘렀고, 나는 유엔이라는 좋은 훈련의 장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게 10년의 시간이 쌓이니 나에게도 스토리와 경험들이 꽤나 축적되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는 뭔가 누가 꾹 찔러도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말할 수 있을 만큼 내 지조 같은 게 생겼고, 여전히 물음표는 많지만 느낌표도 많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감이 들었다. 


시간을 돌려 2021년 1월. 

새해 계획을 기도로 세우며 올해는 나에게 편안함만이 아닌 영적인 광야를 위한 행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유엔 직원이 되려고 노력했던 지난 시간들에 대한 보상을 누리고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나는 그런 과정을 즐겼지 결과는 그만큼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묵상 속에 올해 계획에 박사 지원을 꾹꾹 눌러 적었다. 


"하버드 박사 지원하기."


합격하기가 아니라 지원하기였다는 게 포인트다. 내 환경에서 지원만으로도 이미 성취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지원은 내가 하더라도 그 이후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긴다는 나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2021년 3월. 

아무 학교나 갈 수는 없었다. 나에게 맞는 학교와 프로그램에 가고 싶었고. 학교랭킹을 조사한 후 위에서부터 학교와 프로그램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달간 조사하며 만들어놓은 엑셀 파일에는 어느새 3-5개 학교가 숏리스트가 되었고, 어떤 교수, 어떤 전공, 어떤 프로그램, 얼마나 걸리고, 돈은 얼마나 주는지 등등 가득 차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듯 시간표도 만들어서 매달 어떤 벤치마크를 달성해야 하는지 기록했다. 이럴 때 보면 내가 J인 것 같기도 하지만 J로 살아남기 위한 P의 부단한 노력이라 해두자. 그렇게 정해진 3개의 학교. 하버드. 존스홉킨스. 조지워싱턴. 


이유는 이렇다. 첫째. 실무자를 위한 박사 프로그램을 찾고 있었다. 졸업 후 학계에 남아 연구를 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흔히 아는 교수의 트랙이 아닌, 박사과정을 마치고 실무로 돌아가 시스템 안에서 시스템을 바꾸고 조직을 리드하고, 어젠다를 만들어내는 그런 사람을 키우는 프로그램. 둘째, 시간이 돈이기에 최대한 짧은 프로그램을 찾았다. 하버드는 3년짜리 박사였고, 존스홉킨스는 파트타임으로 일 년에 두 번만 미국에 가면 되는 일하면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조지워싱턴은 이미 같이 일하던 교수가 있었고, 디씨에 있어서 공부하며 컨설팅을 하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셋째. 가족과 살만한 곳을 찾았다. 동부가 우리에겐 그런 곳이었고. 모두 동부에 위치한 학교였다. 


2021년 5월.

이미 시작한 GRE공부. 지금 생각하면 안 해도 되었는데 굳이 준비했다. 코로나 시기에 시험장들도 닫으면서 2년 정도 GRE를 면제해 주는 전례가 없는 시기를 겪었다. 나는 그래도 GRE시험을 통해 나에게 쉽지 않은 여정을 주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건너뛸 수도 있었지만 GRE 점수를 들고 가면 뭔가 더 진심으로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들어와 보니 대부분의 친구들이 GRE를 없이 합격했고, 외국인인 나는 다른 지원자보다 진심을 보인다는 가설하에 GRE를 준비했다. 물론 준비하는 과정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100번이었지만 이것조차 못하면 박사는 어떻게 할지 하며 꾹꾹 참았다. 2번을 보면서 나의 바닥을 보고 영어의 벽을 봤지만, 나 스스로 완주한 것에 충분히 만족한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하버드 박사의 GRE점수에 수학은 넘었지만 (thanks to K-수학교육) Verbal 점수는 평균이하였다. 라이팅도 그렇고. 10년 전에 라이팅 점수보다 아주 조금 오른 걸 보면서 정말 시험 영어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느낀다. 동시에 내 실력이 늘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패스. 


2021년 8월. 

토플도 쉽지는 않았다. 2번을 보며 첫 번째는 읽기/듣기는 만족할만한 점수를 받았지만 말하기가 낮아서 다시 봤다. 두 번째는 급 듣기가 떨어지고 말하기는 고득점을 맞았다.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나의 실력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 하며. 대충 영역별로 최고 점수만 봐달라고 바라면서 토플도 마무리. 약간의 내상이 남았지만 영어시험 다시는 안 본다 하며 잊기로 했다. 때로는 그런 자기 위안이 나를 보호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2021년 9월. 

자기소개서는 세 가지 문제에 관해 500자씩 적어내는 에세이었다. 


1) 너의 프로페셔널 경험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순간을 말해보고 그런 경험들이 어떻게 보건학박사 프로그램을 지원하는데 도움이 되었는가? 나의 답은 대충이랬다. 내가 유니세프에서 일하면서 개발도상국 보건 관련 사회행동변화 연구를 많이 했었다. 특히나 가나에 있을 때 보건 관련 행동에 관한 사회관습을 조사해서 수치화하고 어떤 행동에 어떤 정책적 개입이 필요한지 도출하는 연구를 했었다. 말레이시아에서도 코로나 백신이 오기 전에 어떤 메시지 프레임이 대중들의 백신 접종률을 높을지 무작위대조군연구(RCT)를 통해 미리 조사해서 정부의 보건메시지에 적용했던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마지막은 그런 경험들에서 얻은 것은 학계의 있는 연구자의 우선순위와 관점과 실무자들(정책/프로그램 입안자)의 관점이 너무 다르고 양쪽을 다 이해하는 사람이 많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 중간에 역할을 해보겠다. 정책결정 장에 들어가서 일하면서 학계에서 이야기하는 과학과 이론을 더 접목해서 안에서 시스템을 바꾸는 리더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쓰면서 이런 게 가능해?라고 했지만 일단 지르고 보는 게 지원서니. 눈 딱 감고 질러보았다. 할 수 있다! (뽑아만 주면) 이러면서. 


2) 너의 리더십 자질과 여정을 설명하고 하버드에 와서 어떤 것들을 얻어가서 리더로서의 자질을 강화할 것인지 설명해 봐라. 내 답은 이랬다. 나의 리더십은 다양한 문화권을 아우르는 리더십이다. 내가 석사 때 졸업연설을 했는데 그건 공부 1등이 하는 게 아니라 석사생 전체가 우리 커뮤니티를 대표할만한 사람을 뽑는 인기투표였다. 그런데 내가. 영어도 잘 못하고. 공부도 1등 하고 멀었지만. 인기투표에서 1등을 받아서 졸업식 연사로 설 수 있었던 것은 2년 동안 내가 인종 문화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쑤셔대며 뿌려놓은 우정의 씨앗 때문이다. 그게 신뢰의 끈이었고 그 끈을 친구들이 잡아주었다. 내가 그들 앞에 나서서 뭔가 리드하는 그런 리더십이 아니라 모두가 내가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일관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내가 표를 줘도 나를 대변할 수 있겠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얘기했다. 두 번째 예는 유니세프 네티 프로그램에 선정되어서 2년간 유니세프가 제공하는 리더십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코칭도 받고, 그런 결과로 코로나 대응 때 사무실 긴급구호를 리드하며 나의 리더십을 발휘해서 결과를 달성했다. 그래서 이제 하버드에 가서 누구를 이끄는 리더십이 아니라 어떻게 시스템을 바꾸어내고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전통적 리더십의 프레임을 벋어날 것인지, 영어가 모국어는 아니지만, 선진국 후진국 다 공감할 수 있는 한국의 역사에서 나오는 겸손 리더십을 어떻게 키워낼 것인지. 그걸로 국제기구 시스템에 더 공감력이 있는 리더로 성장할지. 꿈을 마구 욱여넣었다. ENFP의 성향을 마구 드러내며 할 수 있다. 해낼 거다 외치면서. 


3) 네가 하버드에 가지고 올 보건 관련 이슈/문제들은 무엇이며 너는 그걸 여기서 어떻게 해결하려고 노력할 것인가? 그리고 졸업해서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기를 원하는가? 당시 나는 청소년 정신건강문제에 천착해있었고. 국제기구에서 모성아동보건은 많이 다루지만 우선순위에서 낮은 청소년 건강, 특히 정신건강 문제에 더 많은 리서치와 자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정신건강을 예방 차원에서 정신건강 인식개선 및 관리에 초점을 맞추어 국제기구가 어떻게 그 부분에 더 프로그램들과 정책을 지원할지 내 생각을 적었다. 


2021년 11월. 

특이하게 내가 지원한 프로그램은 지원 시에 주어진 몇 개 질문에 답을 해서 영상을 올리는 인터뷰가 포함되어 있었다. Kira라는 프로그램인데 토플 말하기 시험처럼 어떤 사이트에 들어가서 클릭을 하면 어떤 사람이 (나중에 알고 보니 내 프로그램 디렉터였지만) 나와서 나를 환영하고 질문을 한다. 그럼 2분 정도 시간을 가지고 생각을 정리한 후 3분의 시간 동안 비디오로 나의 답을 남긴다. 그렇게 3-4개 질문에 대한 답을 남긴다. 기억나는 질문은 이런 거였다. "리더십(leadership)과 매니지먼트 (management)의 차이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리더십은 비전을 제시하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같은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이라면 매니지먼트는 기존에 있는 것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조금은 보수적인 콘셉트의 리더십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나는 현재의 위치 (status quo)를 항상 챌린지하고 변화를 이끌어가는 리더십에 더 관심이 있다. 라며 마무리를 졌다. 정답이 없는 질문이고 아마도 어떻게 생각을 주장하고 태도를 보는 시험이 아니었나 싶다. 


2021년 12월. 

12월 1일 마감이었던 지원서를 모두 제출했다. 추천서도 내가 존경하는 상사분들과 교수님들로 구성해서 지원했다. 이름을 대면 다 아는 사람들보다 나를 잘 알고 나의 성장의 곡선에 함께했던 분들에게 부탁했다. 나도 이제 추천서를 써주는 나이가 되어보니 그 사람에게 감동을 받으면 추천서도 감동이 묻어 나올 수 있더라. 


12월 마지막날 이메일을 받았다. 1차 면접을 보라는. 1차 면접은 내가 지원하는 박사 프로그램 부디렉터와의 1시간 면접이었다. 왜 나여야 하는지, 왜 지금인지, 왜 이 프로그램을 지원했는지, 왜 하버드여야 하는지. 왜 국제보건인지? 정답은 없지만 내 안에 나만의 생각이 정립이 되어있어야 했다. 만들어낸 답이면 듣는 사람이 단번에 알아챌 수 있는 그런 질문들이었다. 나는 내가 어떤 것들을 포기하고 지금 가는지 말했다. 그만큼 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지원이고 너희가 홈페이지에 이런 사람을 찾는다고 했는데 내가 그런 사람 같다고 어필했다. 마지막으로 그 사람에게 아시아 사람으로 국제기구에 일하면서 내가 세운 나만의 리더십 목표를 설명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고, 서양식의 매너가 조금 부족해도, 성실하고, 공감력이 높고,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에 능하고, 때로는 낮은 자세에서 사람들과 더 깊은 연결을 만들어내고, 무엇보다 문화의 이해의 폭이 넓어서 우리가 일하는 개발도상국 컨택스트를 조금 더 깊게 이해하고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도 부담감이 적은 "한때는 우리도 가난했던 나라"라는 동질의식도 있다고. 무엇보다 리더십의 롤모델이 부족했던 나에게 다음 세대에게 좋은 리더십의 롤모델이 되고 싶다고. 너무 약해 보이는 것 같았지만 내 솔직함으로 전해지길 바라며 다 던졌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마지막에 나에게 질문이 없냐고 물어보기에 스마트한 질문 2-3개를 준비해서 시간을 마무리 졌다. 면접관이 듣고 공감해 주고 자기 이야기도 하며 이민자로 정체성을 찾아갔던 이야기도 들려주는 걸 보면서 이 분에게 나의 진심이 잘 전해졌구나 싶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2022년 1월.

새해가 밝았고, 까먹을 즈음 2차 인터뷰를 보라는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보건대 헬스커뮤니케이션 담당 인도인 교수님이었다. 지원서에도 그분 이름을 언급하며 같이 일하고 싶다는 얘기를 해서 더욱 기대와 긴장이 되었다. 이분과의 1시간 면접동안 이분은 나에게 왜 학계로 가는 박사트랙에 지원하지 않았냐는 질문들을 하셨다. 내 논문들을 보니 전통적인 박사트랙으로 했어도 승산이 있었을 거라는 말이었다. 나는 왜 그렇지 않았는지, 학계와 교수님의 연구가 얼마나 중요하고 세상을 바꾸는지 잘 알지만, 내가 만난 세계는 그런 최신, 최고의 연구 결과들이 닿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 곳이었기에, 내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과학과 학계의 언어를 배우고 이해하되 현장의 언어로 정책의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얘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3년간 빠르게 배우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서 하버드에서 배운 것을 현장에 전파(?)하며 현장과 학계의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메우는 역할이 나에게 맞다고 말했다. 100퍼센트 공감을 받지는 못했지만 사실 나에게 평생 연구를 하기에는 세상의 변화들을 몸으로 느끼고 그 변화의 중심에 있는 국제기구나 현장이 더 살만한 곳 같았다. 동시에 내가 가진 장점들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고. 


2022년 2월. 

모든 것이 끝나고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이불에서 핸드폰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바쁜 하루들이 계속되었지만 머릿속에 떠나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수년을 마음에 품고 지난 1년 매일 시간을 쪼개서 준비했던 여정이었다. 합격하면 좋겠지만, 하버드라는 이름의 무게가 너무 크게 느껴져서 분명 이 넓은 세상에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있겠지 하면서 떨어졌을 때 받을 충격을 미리 완화하고 있었다. 


2022년 2월 10일. 

"Congratulations"으로 시작된 이메일에 소리를 질렀다. 핸드폰으로 확인하고 믿기지가 않아서 컴퓨터 방으로 달려가 큰 모니터로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와이프를 불렀다. "고운아 나 하버드 합격했어 ㅠㅠ" 내가 하버드라니. 내가 뭐라고. 나같이 작고 부족한 자에게 큰 은혜였다. 지난 10년간 시간에 대한 보상같이 느껴지기도 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또 다른 광야 같은 느낌도 들었다. 고생길의 시작이기도 한. 

합격 이메일을 받고 며칠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자라면서 들었던 많은 부정적인 말들이 있었다. 때로는 선생님들이 그랬고 주변 어른들이 그랬었던 것 같다. 말이 많다고, 덤벙댄다고, 넌 안된다고, 힘들 거라고. 나는 이 동네 출신이라, 이 학교 출신이라, 이런 배경이라 안될 것 같다는 세상의 보이지 않는 규칙이 나를 짓누르기도 했다. 그런데 하버드 합격은 나에게 그런 과거의 무게들에서 나를 가볍게 해주는 거 같았다. 


마치 하나님이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았다. 너는 작은 자이지만 내가 들어 쓰면 네가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내가 응답하겠고, 그곳에서 너를 새롭게 단련시키겠다. 너는 나의 작은 종이니 너에게 주어진 그 달란트로 마음껏 불려보아라. 내가 너에게 다시 와서 물을 때에 충성된 종으로 살았다고 칭찬해 주고자 하니 네가 가진 것을 세상에서 충분히 활용해 보아라. 


2022년 9월.

합격 후에 알게 된 몇 가지 사실. 200명이 넘게 지원해서 9명이 합격했고, 합격률이 약 4.5%가 되었던 과정. 학계에 남는 연구자 트랙 박사과정에는 한해 걸러 한 명정도 한국인 입학생이 있었지만 리더십 트랙인 내가 있는 박사프로그램(Doctor of Public Health) 에는 지금까지 한국인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뼛속까지 한국인인 나에게 새로운 길을 만들어낸다는 뿌듯함도 있었던 것이 사실. 

2023년 11월.

하버드에 합격한 지 1년 반이 흘렀고, 이제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그때의 감정을 기록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 하버드는 세상에서 불안과 의심과 항상 싸우던 나에게 하나님이 주신 (지극히) 세상적인 보험이고, 이것을 통해 나의 부족함을 내려놓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사람으로 살라고 주어주신 티켓과도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닌 그런 티켓. 


그래서 여전히 하버드의 무게는 무겁고, 그 무게를 같이 져주시는 주님이 있기에 가볍기도 하다. 하버드 교정을 걸을 때마다 문득문득 감사함에 울컥한다. 내가 뭐라고. 이런 좋은 곳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시는지. 그래서 더 겸손하게 더 낮은 자세로 세상을 바라본다. 나의 이 작은 경험으로 큰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리를 찾아서, 주님께서 보여주는 자세로 살아가는 삶. 그 무익한 종의 길을 향해 오늘도 나아간다.  


1년 반이 지나고 여전히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부족할 줄만 알았던 나의 1년 반도 감사함으로 채워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매일 느끼며 광야의 만나를 체험하게 해 주셨다. 앞으로도 삶의 그런 축복들이 가득하기를. 그리고 그 감사함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내 삶을 나눌 수 있기를. 부족한 자의 심정으로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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