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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cret Y Feb 23. 2024

서른에 만난 남자들 - 4월

Chapter 4. 썸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마치 머신러닝 로봇 마냥 모든 정보를 탐색하고 저장하게 된다. 무심코 했던 행동들도 유심히 지켜보고 스치며 했던 사소한 말들도 기억한다. 특히 나는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딥러닝이 너무 빠른 탓에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쏙쏙 흡수한다. 심지어 당사자가 옆에 있지 않아도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셀프 러닝의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때로는 내 모든 것을 잠식시켜 버릴 만큼 그 사람과 동기화가 되어버려 나를 잠시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나와 비슷한 경향을 가진 사람에게는 전혀 흥미가 없는 것 같다. 나와 비슷한 요소는 이미 나에게는 학습된, 내재된 정보인 것이기 때문일까. 아니, 흥미가 없다기보다 오히려 혐오한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겠다. 내가 가진 기질이나 특성을 스스로 맘에 들어하지 않아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나와 비슷한 사람은 내 약점이나 생각하는 것도 비슷할 것 같아서 일단 재미가 없다. 대개 내가 그동안 싫어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나와 닮은 모습을 발견할 때였고, 나와 다른 모습을 발견하면 그제야 관심이 간다. 게다가 나는 늘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상당한 편이다. 다만 새로운 것이 늘 좋은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것이 다행히 생산적인 쪽이라면 나에게 도움이 되었고 파괴적인 쪽이라면 나 자신도 서서히 파괴시킨다. (불법만 아니라면) 세상에 나쁜 경험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굳이 좋고 나쁨을 나눠보자면, 그 사람으로 인해 새로운 음식이나 음악, 정치, 경제 이슈 등에 관심이 생겼다면 좋은 편에 속하는 것이고, 그 사람으로 인해 술이나 담배 등을 배우게 된 것은 나쁜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고로 짧든 길든 연애를 하고 나면 특정 분야에 대한 시야가 비교적 짧은 시간에 확 넓어진다. 이것이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르겠지만. (자고로 취향은 확실하고 구체적인 것이 좋은데 이것저것 잡다하게 섞여버리면 내가 진짜 뭘 좋아하는지 파악하기가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날은 유난히도 힘들었다. 월요일부터 시달려온 야근 탓인지 이유 모를 무기력함이 불쑥 찾아왔다. 퇴근 시간을 애매하게 넘긴 9시 무렵에 사무실을 나와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점심시간과는 사뭇 다른 풍경에 선선한 바람이 더해지니 약간 센치해진 마음이 들었다. 몸은 피곤하지만 이대로 집에 가긴 아쉬운 상태, 즉 한마디로 술이 고픈 상태로 무의미하게 카톡창을 쓱 훑어보지만 약속을 잡긴 애매한 시간이다. 그렇다고 집에 가자니 살짝 아쉬운 찰나에 우연히 작은 bar를 하나 발견했다. 평소엔 혼밥도 잘 안 하면서 문득 혼술이나 해볼까 하는 용기가 생겨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평일이라 그런지 손님이 많지는 않은 약간 한산한 분위기였고 다행스럽게도 조명이 어두워서 혼자인 것을 덜 어색하게 만들어 주었다. 중간을 살짝 벗어난 바 모퉁이에 앉아서 메뉴판을 둘러봤다. 혼술은 처음이라 뭘 마셔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색하지 않은 척 와인 한잔과 간단한 안주를 시켰다. 조금 편한 자세로 고쳐 앉고 바를 둘러보니 문득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서른쯤 되니 혼술도 다 해보고, 어쩐지 어른이 된 느낌이랄까.


이윽고 와인과 비스킷 위에 치즈와 절인 토마토가 올려진 안주가 나왔다. 와인 한 모금과 비스킷을 한입 베어 먹고 인스타그램을 둘러보았다. 이 순간을 기념하는 스토리용 사진을 한 장 올리고, 친구들과의 단톡 방에도 사진을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며 오늘 하루를 곱씹어본다. 집이나 사무실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가지니 혼자인 것도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20대가 얼마 남지 않아 슬펐지만 이렇게 혼술도 즐길 줄 아는 멋진 서른이 된다면 나이 드는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는 정처 없는 사고의 흐름을 좇아가고 있었다. 와인 맛이 어떠냐는 사장님의 물음에 그럭저럭 괜찮다고 답하고는 다시 휴대폰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 사람과의 만남도 그랬다. 나와 너무 다른 삶을 살고 있어서 그 사람의 이야기만 들어도 시간 가는 줄 몰랐고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내 눈은 언제나 반짝였다.


Lesson 4.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늘 예상치 못하게 다가온다. 그것도 기대치가 0일 때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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