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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CHO Aug 26. 2022

우영우,  그리고 거의 모든 자폐의 역사

뜬금없는 북펀딩 이야기로 오늘 글을 시작한다.


작년에  펀딩을 하나 했다.


출처: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의 발행인인 강병철 선생님의 페이스북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0458450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이 책은 세상에 나오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힘겹게나마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알라딘의 북펀딩 프로그램 덕분이었고, 여기에 작게나마 나도 기꺼이 참여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인터넷 서점 유목민 생활을 청산하고 알라딘에서만 책을 구입한다) 한국의 가족에게 이 책이 배달되었으나 미국에서 받아보기엔 애매했다. 결국 전자책으로 사서 읽었는데, 한국에 가서 보니 800쪽의 부피감은 어마어마하더라는.



자폐인의 존재를 환기시켜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최근 자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힘이다.

사실 자폐인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혹자는 말한다. 어차피 드라마는 판타지이고, 드라마와 현실은 다른 것이니 혼동하면 안 된다고.

근데 그렇게 치부해버리기엔 드라마 속 현실이 너무 현실적이다.  집에서 반복되는 일상을 티브이에서도 봐야 하는 것. 그것 자체가 불편하다. 보이고 싶지 않은 나의 일상을 내가 타자의 눈으로 확인하는 것. 이것이 참 괴롭다. 거기에 추가되는 드라마적 판타지는 그래서 나의 현실을 더 비참하게 만든다. 고기능성 자폐인의 가족인 나도 이럴진대 마일드한 자폐인이나 중증 자폐인을 가족 구성원으로 둔 이들은 오죽할까. 이런 이유로 이 드라마가 불편하다는 글, 여기에서 나아가 '자폐인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적나라하게 알리는 글까지 올라온다.

내 관점에서 이 드라마의 가장 큰 공헌은 자폐, 아니 좀 더 확장하여 지적 장애인의 가족의 이야기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어떤 이들은 이들의 이야기에 공감을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반박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반응이 나온다는 것은, 자폐인 가족의 이야기를 건성이든, 제대로든, 어떤 식으로든 들었다는 증거이다. 그 전에는

2021년 CDC의 보고에 의하면 미국에서 사는 아이 44명 중 1명이 자폐로 진단받았다. 한국 아이들 중 2.64%(2011년 기준)가 자폐인이지만 그들의 삶이 어떤지, 그 가족의 삶은 어떤지 그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다. 악플이 무플보다 나은 것처럼, 부정적인 의견이 무관심보다는 낫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자폐인과 가족들은 분명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 취급을 받아 왔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 자폐인

자폐의 역사가 그러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았다.

의사 Leo Kanner가 약 80년 전에 ‘Autism’ 혹은 ‘자폐’라는 병명으로 환자들을 분류하기 이전에도 자폐인들은 존재했다. 비록 '바보', '백치', '정신박약아', '조현병자'로 불리긴 했지만.

들판에 핀 이름 없는 야생화도 자기 이름을 가지면 그 꽃도 비로소 존재 가치가 생긴다. 자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적으로 '정신 이상자'로 뭉뚱그려지던 자폐인들이 '자폐'라는 의학적 이름을 갖게 되면서 비로소 의학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는 토대가 갖추어진 것이다!


그러나 자폐를 의학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한 것으로 그로부터 한참 후부터였다. 그전까지 자폐인들은 일반인과 분리된 채 수용 기관에 방치되어 살았고, 이곳에서 짐승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취급을 받았다. 심지어 이들은 ‘열등하다’는 이유로 나치에 의해 학살당하기도 했다.

그들의 끔찍한 현실에 나는 책을 읽다가 도저히 더 못 읽고 덮어버린 적이 많았다. 그렇게 존재 없이 살다 간 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영혼이나마 편안하기를 비는 것. 이것이 전부인 것이 너무 슬펐다. 그 당시에 우리 아이가 태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했던 것은 더 슬프다.


80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이만큼의 성과를 이루어 낸 것은 바로 서구 자폐인 부모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투쟁 덕분이었다. 역시 부모는 강했다. 그들은 내 아이를 위해, 그리고 내 아이 같은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모임을 갖고,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아이들이 가져야 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 때로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일시적으로 후퇴를 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자폐인 자녀를 위해 결과적으로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꾸준히 전진했다. 그 덕에 우리는 자폐인  자녀들을 수용시설이 아닌 학교에 보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자폐인 부모 공동체는 자폐를 의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펀딩을 조성해 연구를 지원하고, 대중문화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등,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했다. 최근에는 자폐인의 부모가 아닌 자폐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고 이제 사회는 그들이 가진 '특별한' 가능성에 주목하기에 이르렀다. 의학적으로 자폐를 다양한 범위를 가진 스펙트럼(ASD: Autism Spectrum Disorder) 보는 관점에서 나아가, 인간이 가진 다양한 신경적 특수성(Neurodiversity)의 한 측면으로 존중받게 된 것이고 이러한 배경에서 초원이와, 시온이가 한국 대중문화에 등장해 주목을 받았고, '우영우'도 탄생할 수 있었다.


비현실적인, 그러나 너무나 현실적인

'영우'라는 캐릭터는 비현실적이지만, 드라마 속 그녀가 겪는 현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지금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의대생이 죽고 자폐인이 살면 국가적 손실' 이란 글에 '좋아요'를 누릅니다. 그게 우리가 짊어진 이 장애의 무게입니다.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3회


이 드라마의 3회 차는 천재인 영우조차도 '자폐인'으로서 일반인들과 사이에서 겪는 어려움을 다룬다.

이 드라마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인간답게 살 권리 중 사랑하고, 사랑받을 권리에 대해 질문을 던진 것이다.  비장애인들과 대칭되는 사건을 통해 말이다.


장애인한테도 나쁜 남자와 사랑에 빠질 자유는 있지 않습니까? 신혜영 씨가 경험한 것이 사랑이었는지 성폭행이었는지 그 판단은 신혜영 씨의 몫입니다. 그걸 어머니와 재판부가 대신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세요.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10회


순진하고 만만하다 싶으면 달려들어서 내 아이의 마음과 돈과 몸을 뽑아 먹으려는 나쁜 xx들은 주변 어디에든 있다. 드라마 속의 지체 장애인인 신혜영에게도, 변호사인 최수연에게도. 이들이 타인에 대해 갖는 감정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내 감정을 내가 아닌 타인이 결정하게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절절하게 깨닫게 되었던 회차였달까. 내가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장애인들의 사랑. 나는 자폐인 가족 구성원으로서 어디에 지지를 해 주어야 하나.

 

내 안은 나 자신으로 가득 차 있어서 가까이 있는 사람을 외롭게 만듭니다.
언제, 왜 그렇게 만드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안 그럴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준호를 좋아하지만, 이준호씨를 외롭지 않게 만들 자신이 없습니다.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15회

사랑하는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사랑.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외롭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우영우의 사랑과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이혼당했던 정명석의 사랑. 둘 중 누구의 사랑이 더 낫다 아니다를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럼에도 너무나 쉽게 장애인의 사랑은 '도와주고 싶은 불쌍한 사람에 대한 연민'이라고 단정한다. 왜 장애인들의 사랑은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일까.


작가가 이 드라마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어쩌면 자폐인을 포함한 장애인들도 일반인들처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일반인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 그것이 왜 지금은 이토록 어려운지, 묻는 것 같다. 이런 면에서 이 드라마는 자폐인 가족인 나에게도 숙제를 안겨 준 드라마다. 자폐인들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리고 나 조차도 인식을 바꾸어야 할 부분이 많다.


저는 그 외뿔 고래와 같습니다.
낯선 바다에서 낯선 흰고래들과 함께 살고 있어요.
모두가 저와 다르니까 적응하기 쉽지 않고 저를 싫어하는 고래들도 많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게 제 삶이니까요.
제 삶은 이상하고 별나지만, 가치 있고 아름답습니다.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16회



결국 이 대사에서 울고 말았다.

이상하고 별나지만, 가치 있고 아름다운 우리 아이의 삶. 나는 과연 이 아이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왜 흰고래가 못 되느냐고 아이를 다그쳤던 그간의 일들이 떠올라 아이에게 미안했고,

외로운 외뿔 고래로 살아도 내 삶은 충분히 아름답다는 말에 위로받았다.



영우는 '한바다'라는 큰 바다에서 한 마리 '외뿔 고래'로서 낯선 흰고래'들과 살고 있다.

우리는 이런 류의 이야기들을 이미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아마도 그중 제일 유명한 이야기는 본질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백조였지만 오리들 틈 사이에서는 불과 '미운 오리'에 불과했던 이야기일 듯. (나도 한때는 ‘우리 아이가 본질은 백조 아닐까’ 하는 착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드라마 속에서 만난 오리는 백조가 아니었다. '파란 오리'였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1회 첫장면

80년간에 걸친 자폐인 가족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의학적인 발전 덕분에 자폐인은 더 이상 투명 오리로 취급받지 않게 되었고,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처럼 각자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 특수성에 불과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이해하고 있는 신경적 다양성이다.

이러한 발전을 이룩하게 전까지 자폐인들은 수용 시설에서 그들끼리 모여 살았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노란 오리들과 아니면 흰고래 벨루가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다. 이 점은 내가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아이가 딱 그렇다.

사실 우리는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바로 노란 오리라고.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는 나를 파란 오리라고 지칭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파란 오리이고, 외뿔 고래라고 해서 내 삶이 가치 없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폐, 장애, 나아가 모든 종류의 차별은 우리 개개인이 개성을 바탕으로 조화를 이루며 사는데 가장 큰 방해 요소이다. 이 것은 학교에서부터 교육이 되어야 하는데, 단순히 '친구끼리 사이좋게 놀아라'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 학교의 디자인 원칙 중 하나인 'Personalization'의 관점은 이런 면에서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함께 조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원칙이다. 그리고 내가 이 학교에서 학부모로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Personalization'은 구호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 학교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영우 같은 아이들과도 함께 팀을 만들어 함께 일하는지를 이미 가르치고 있고, 아이들은 생각보다 이 가르침을 꽤 빠른 속도로 받아들인다.


2022년 8월 21일

ECHO


#PBL #Personalization #거의모든자폐의역사 #우영우 #차별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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