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수완나품 공항에서
방콕에서 3일 동안 워낙 신나게 보내서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비엔나 #VIE 행. 사실 우리에겐 가장 고난도 코스들 중 하나가 남았다.
1. 새벽 2시 20에 출발하는 #BR61을 타야 한다.
2. 장장 12시간
3. 그것도 이코노미로.
그동안 비즈니스로 이동해서 편하게 이동한 호야와 나, 이제부터 조금씩 힘든 일정들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중 가장 첫 번째는 이코노미로 비엔나까지 이코노미로 이동하는 이 날의 비행이었다.
내가 언제부터 비즈니스석 타고 다녔다고..
이런 마음으로 맘 편하게 비즈니스석 좌석 찾는 것을 포기하고 이코노미를 끊기는 했지만, 요즘 들어 자꾸 허리가 고장이 나는 터라 만약에라도 허릿병이 도지면 앞으로의 8일 일정은 다 망치는 거다. 사실 이 여행을 건강하게 마치려는 목적으로 올 1월부터 F45를 끊어 열심히 다닌 덕인지 그전에 비해 허릿병이 도지는 빈도가 최근 들어 현저히 줄기는 했다. 그래도 여행 중에 이런 불상사가 생기면 안 되니 조심, 또 조심해서 다녔고, 그런 면에서 12시간 동안 허리도 펴지 못하고 내내 앉아서 가야 하는 이 날의 비행은 나에게는 분명 쉽지 않은 도전임은 분명했다.
호야의 성화 덕에 상당히 이르게 공항에 도착했다.
비엔나로 출발알 BR065편은 앞으로 6시간 이상 기다려야 출발할 터였다. 기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면서 남는 시간 동안 뭘 할까 고민했는데, 공항에도 마사지를 받을 수 있단다. 당연히 시내보다는 가격이 높지만 미국에 비하면 여전히 싼 가격이다. '이거다' 싶어 찾아갔는데, 공항 지하에 있는 마사지 샵은 간이 칸막이로 설치된, 제대로 된 사업장을 둔 곳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어 현금만 받는다고 해서 돈을 환전하러 간 사이에 마지막 손님을 받고 마감이 되어버려 결국 공항에서도 마사지를 못 받았다
보세 구역에 있는 라운지라도 가자 싶어 일찍 출국 수속을 받았다. BR065편은 대만을 출발해 방콕을 경유해 비엔나로 가는 일정이라 그런지 따로 카운터가 열려있지 않아 기계로만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호야는 직접 여권 스캔을 하며 체크인을 하고 수하물도 부쳤다. 체크인할 수하물들을 저울에 올려 무게를 확인하고, 출력된 러기지 택들을 부칠 체크인 가방에 조심스레 붙인 후, 컨베이어 벨트에 올렸다. 가방이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이동하며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되돌아섰다.
호야는 이 RTW 여행 통틀어 직접 체크인을 방콕과 비엔나에서 두 번 했다.
남들에게는 아주 평범한 여행 루틴 중 하나. 그러나 호야에게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호야는 여행이 끝난 후,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 항공사 지상 직원으로 일하고 싶어요!
이번 여행은 호야가 미래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를 찾기 위한 마일스톤을 찾는 것이 목적임을 이미 나는 처음에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렇다. 우리는 이 여행을 통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찾았다!
그래 호야, 우리 거기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이 나라는 네가 하고 싶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잖니.
사실 호야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 즈음 샌디에고 공항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발룬티어하려고 여러 번 개인적으로 컨택을 했음에도 별 진전이 없었다. 필리스 선생님이 어떻게든 이 자리를 뚫어보려고 알음알음 연결된 사람들을 찾았으나 선생님도 결국 마땅한 연결 고리를 찾지 못하셔서 결국 포기한 기억이 있다.
호야는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발달장애인으로 인정을 받기 때문에 캘리포니아 주정부와 미 재활국의 펀딩으로 다양한 치료들과 훈련을 받을 수 있고, 직업 훈련도 포함이 된다. 나는 호야의 이 펀딩 프로그램을 호야의 개인적인 장점에 포커스를 두는 방향으로 전환을 준비 중이고, 관련 미팅을 하고 있다. 그중 한 미팅에서 ‘호야가 항공사 지상직으로 일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하며 공항 발룬티어를 결국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했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관련자가 샌디에고 공항에 있는 미 해군 소집 장소에서 발룬티어하는 것을 제안해 주었다. 일반병들 뿐 아니라 장교들, 그리고 퇴역 군인들도 이용하는 곳이라 이런저런 도움이 필요하다면서 그 자리에 지원해 볼 것을 제안했다.
이렇게 호야가 항공사 지상직원으로 일하기 위한 첫 단계가 순조롭게 시작되고 있다. 언젠가 호야 덕분에 직원 가족 할인을 받아 RTW를 떠날 그날을 기대하며 파이팅!
방콕 수완나품 공항은 상당히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공항이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가진 Priority Pass로 갈만한 라운지들도 여러 군데가 있었다. 미국이랑 유럽에서는 어쩐 일인지 이 패스로 갈 만한 공항 라운지가 별로 없었는데, 확실히 아시아에서는 받는 라운지가 많다. 이렇게 해서 PP를 유지해야 할 이유 하나가 더 추가된 셈.
출국 수속 마치고 제일 가까운 곳에 있던 미라클 라운지로 들어갔다. 사실 내가 가진 PP로 비즈니스. 퍼스트 둘 다 입장할 수 있는데, 그걸 모르고 가장 가까운데 있는 비즈니스 라운지로 들어간 것.
문제는 여기가 완전 도떼기시장이었다. 사람 많은 거야 뭐 사업주 입장에서 반가운 일일테니 그건 상관없었는데 자리싸움이 치열했다. 앉을만한 좌석들은 자리가 이미 맡아져 있고 심지어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아 그 자리에 앉으려고 하니 이 좌석과 거리를 두고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자기 친구 자리라며 못 앉게 한다. 친구 자리라고 우길 거면 물건 하나 정도 놔두는 성의 정도는 좀 보일 것이지..
다행히 그 옆자리에 앉아있던 젊은 남자가 맥주병을 들고일어나며 이거 Last sip이니 자기 자리에 앉으란다. 그 덕에 간신히 자리를 잡았는데, 이 사람이 먹고 간 접시와 술병이 테이블 위에 그득하게 있는데도 아무도 치우러 안 온다. 기다리다 못해 직원 1 한테 치워달라 요청하니 짜증 낸다. 계속 기다렸는데도 아무도 안 와 직원 2에게 요청했더니 엉뚱한 자리를 치운다. 결국 내 테이블은 내가 떠날 때까지 아무도 치우지 않았다. 내가 방콕에서 겪은 가장 불친절한 경험이다.
게다가 라운지가 냉방이 잘 안 되는지, 아니면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열기 때문인지 엄청 더웠다. 라운지 가운데에 따로 냉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는데, 그거 말고는 다른 냉방 기구는 없는 듯했다. 서빙되는 식기는 제대로 안 말렸는지 물기가 그대로였고..
마지막 날 타이 마사지를 못 받아 가뜩이나 맘 상해 있는 데다, 라운지 안은 찌지, 땀은 줄줄 나지, 옷에서 냄새는 나지, 세탁한 옷들은 짐으로 다 부쳐버려서 갈아입을 수도 없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일단 허기부터 달랬다. 다행히 라운지에서 제공되는 음식들은 나쁘지 않았고, A La Carte로 완탕 스프랑 쌀국수가 제공되고 있었다. 이 음식들로 일단 허기를 달랜 후, 샤워장으로 가서 샤워를 했다. 입던 옷을 입어야 해서 찜찜하긴 했어도 적어도 기분은 나아졌다. 새삼 라운지에 샤워 시설이 있는 것이 고마웠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못하겠다 싶어 다른 라운지로 옮기긴 해야겠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타이완에서 방콕 경유해 비엔나 가는 비행기는 방콕으로 열심히 날아오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게이트조차도 배정이 안 되어 있는 것은 당연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 맘대로 어느 한쪽으로 방향으로 계속 가는 것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방콕 수완낫폼 공항에서는 모, 아니면 도였다. 방콕 수완낫품 공항은 산책하기엔 너무 크다. 그래서 가장 중간에 있는 미라클로 간 거였는데, 실패했으니 이제는 선택의 시간. 그나마 에바항공 라운지나 스타 얼라이언스 항공사 라운지가 몰린 쪽으로 가는 것이 확률에 높겠다 싶었다. 마침 에바 항공 라운지 주변에 있는 라운지 중 터키 항공 라운지가 PP를 받았다. 그래, 여기로 가자!
어허.. 여기는 시원하다 못해 춥다. 게다가 라운지로 올라오는 메인 통로에서 멀어 그런지 사람도 거의 없다.
이미 배는 부르니 더 먹을 건 필요 없고, 2시까지 내가 졸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각성시켜 줄 그 무엇, 즉 카페인이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터키 항공 라운지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여기엔 터키식 커피 내려주는 기계가 구비되어 있어 커피가 끓어 넘치는 실수를 해가며 간신히 투샷으로 내렸더니 잠이 싹 달아났다. 이 상태로는 11시간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석식이 조식으로 바뀌는 신기한 광경을 보며 랩탑으로 밀린 글감들을 정리하고 12시경 나왔다. 이 공항 면세점과 택스 리턴 부스는 24시간 내내 운영한단다. 24시간 동안 면세점을 돌릴 수 있는 나라가 전 세계에 과연 몇이나 될까. 새삼 태국이 얼마나 젊은 나라인지 체감되었다.
4층 10번 게이트 U 카운터에서 VAT Refund도 받고, 마그넷이랑 호랑이 연고, 그리고 남편이 모으고 있는 마그넷을 사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호야는 6시간이 넘는 대기 중에도 덥다, 배고프다, 힘들다는 불평 하나 하지 않았다. 이 라운지에서 저 라운지로 이동하는 것부터 신선한 경험이었는지 내내 신나게 캐리온 가방을 밀고 다니며 나를 따라다녔다. 역시 비행기 여행에 최적화된 나의 아들, 호야다웠다.
내가 면세점 쇼핑하는 동안 자기는 탑승구에 먼저 가 있겠다던 호야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가 와야 티켓을 보여주고 탑승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빨리 오라고. 줄이 이미 길단다.
공항에서의 시간 관리는 호야가 더 정확하다. 아들의 경고를 따르지 않았다가 낭패 본 적이 몇 번 있는지라 호야님 명령대로 부랴부랴 탑승구 입구로 가 티켓이랑 여권을 보여주고는 탑승구 앞으로 갔다. 드디어 비엔나로 출발.
에바항공 BR061편 운항에 사용 되는 기재는 A380이다. 이코노미여도 대한항공이 3-4-3으로 10명씩 한 열에 배정한 것과 달리, 여기는 3-3-3 배열이다. 이 정도면 같은 이코노미여도 훨씬 인간적이다. 자다가 한 번씩 몸을 뒤틀 수 있으니 말이다.
창가 자리를 선호하는 호야에게 창가쪽을 양보하고 나는 중간석에 앉았다. 내 왼쪽에 앉은 분이 남자분이라 호야가 앉아주었으면 좋겠는데, 괜히 서로 맘 상할까 싶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은 좌석에 앉자마자 비행기 출발도 전부터 안대를 하고 자더니 기내식도 안 먹고, 화장실도 안 가고, 꼼짝도 않고 내리 잔다. 이 사람이 일어나면 나도 일어나 화장실을 가려고 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화장실 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이 괴물 같은 분을 두 번이나 깨우는 실례를 해야했다.
11시간 비행이 거의 끝나가고 조식이 기내식으로 서빙되고 있던 그때, 호야가 나에게 조용히 말한다.
엄마, 다음부터 비행기는 한 번만 타요.
너도 힘들긴 힘들구나 ㅎㅎㅎㅎ
근데 아들아, 네 인생에 과연 이렇게 RTW를 갈 날이 언제 또 오겠니.. 즐기자. 즐겁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