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기능성 자폐인의 레고랜드 취업기(마무리)
내가 '능력자'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사람이다. 이런 면에서 이번 호야의 사고를 기회로 만든 사람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남편이다.
고등학교에 올라간 후부터일까.
남편이 호야에게 조언을 하면 여기에 대해 호야가 굉장히 예민하고 날카롭게 방어적으로 반응했다. 아빠가 아무리 협조적인 태도로 조언을 해도 호야가 반사적으로 반항을 하는 것이다. 사춘기 때야 그러려니 했지만, 스무 살이 된 지금 가지도 시종일관 호야가 이런 태도를 보이니 남편은 아들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일이 잦아졌다. 사춘기 때보다 더 둘의 사이가 시나브로 나빠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라 중간에서 내가 중재도 하고, 아들을 타이르기도 하고, 야단을 쳐도 그때 뿐. 둘의 사이는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남편과 내가 20년 동안 호야를 최고로는 아니어도 최선을 다 해 키우고 있다는 것은 자부할 수 있지만 아들 입장에서는 우리의 양육방식이 힘들었던 적이 많았을 것이다. 때로는 서운하기도 했었을 테고, 또 버거웠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또 호야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호야가 자폐인이어도 일반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아이라 우리가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우리의 요구나 훈육이 호야 입장에서 자신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남편에게 반응하는 방식이 나에 대한 방식보다 훨씬 날카롭고 반항적이라는 것은 남편에 대해 호야가 느꼈던 감정이 더 안 좋았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호야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딴 소리지만 자폐인 아이를 키우며 가장 힘든 것 중 하나는 일반인인 부모가 자폐인인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의 감정을 이해하고, 때로는 생각을 읽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자신을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면은 아빠보다는 엄마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이긴 하다.
남편도 어느 시점부터는 자신의 방식보다는 아이의 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원래부터 강압적인 스타일의 아빠는 아니었지만, 남편 또한 다혈질적인 측면이 있어서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할 때는 직선적이었다. 아이 입장에서 강압적이라고 느꼈을 수도 있었다. 그랬던 남편이 좀 더 조심스럽게 지적하려고 노력했고, 호야를 존중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꿨다. 이런 남편의 태도 변화는 내가 옆에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아들의 공격적인 태도는 나아지지 않았다. 아빠는 호야에게 있어 "내가 하려고 하는 모든 것을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람", 즉 방해자쯤으로 여긴다는 것이 느껴졌다. 호야는 날이 갈수록 아빠에게 더 날을 세웠다.
남편은 응급실에서 수술받을 UCSD 힐크레스트 병원으로 자정에 전원 할 때, 호야와 함께 구급차를 타고 움직였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이틀 내내 옆에서 아들의 소변 시중과 간호를 자처했고 대신 나를 집으로 들여보냈다. 입맛이 없다며 먹는 것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옆에서 아들 수발을 다 들었고, 퇴원해 집에 왔을 때에도 회사일까지 미뤄두고 아들 간호를 했다. 호야가 복통으로 화장실을 들락날락했을 때도 항상 옆에서 뒤처리를 다 한 것은 물론, 아들을 샤워시키고, 아들의 상태를 기록했다. 심지어 대변 사진도 찍어 매일 아들의 상태를 비교하고 확인했다. 호야의 인턴십이 시작하는 날인 Signing Day에 회사 연차를 내고 따라가서 휠체어 사용이 익숙하지 않은 호야 수발을 들었다.
수술한 지 2주 후 깁스를 푸는 날, 집도의 선생님은 x-ray 사진을 보며 회복이 잘 되고 있다며 수술 전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는 이 날 호야의 수술 전 다리 상태를 처음으로 보았다. 호야가 다리가 '덜그럭거린다'라고 표현했던 상황이 어떤 것인지 처음 알았다. 경골과 비골 모두 부러져서 완벽하게 어긋나 있었다. 남편은 이 사진을 2주 전에 벌써 본 것이다. 나는 그제야 병실에서 보였던 남편의 눈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무엇 하나 제대로 즐길 줄 몰랐던 우리 아들.
성인이 다 되어서야 간신히 좋아할 만한 것을 찾았는데,
레슨 세 번만에 이렇게 심하게 다쳐서 좋아하고 즐기던 것을 못하게 되다니..
얘는 매 번 뭘 할 때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렵냐..
다리가 얼마나 심하게 부러졌는지 엑스레이를 보는 순간 비전문가인 자신도 알겠더라..
우리 아들이 너무 불쌍하고, 안쓰러워 가슴 너무 아프다며 남편은 아들 앞에서는 차마 보이지 못한 눈물을 내 앞에서 보이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호야는 이제 더 이상 아빠에게 뾰족하게 굴지 않는다. 아픈데 자기를 잘 간호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아빠에게 자주 한다. 얼마 전에는 아들에게 땡큐 레터도 받았다. 남편은 이 편지를 받고 또 한 번 눈물을 쏟았다.
그전엔 아빠가 언제 오냐고 항상 나에게 묻던 아들, 이제는 아빠에게 직접 톡을 보내 묻는다. 함께 출사 하러 나가자고 제안하면 흔쾌히 가자고 하고, 엄마 없이도 아빠와 둘이서만 놀러 나가기도 한다. 최근에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자신이 쏠 테니 다 같이 영화 보러 가잔다. 보자고 제안한 영화가 폭력과 성적인 장면이 난무한 19금인 것은.. 이 시점에서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ㅋㅋㅋ

이런 아빠의 마음을 딸도 느낀 것 같다. 항상 가족들이 우선이고 최고인 아빠. 이 점을 인정을 하면서도 어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했던 아빠의 사랑. 막상 오빠가 아팠을 때 아빠가 최선을 다해 케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빠의 진심에 딸도 고마움을 느낀 것이다.
내가 아프면 아빠가 나에게도 이렇게 하겠구나..
그리고 내년 이맘때쯤이면 대학 진학을 해 집을 떠날 텐데,
내가 안심하고 집을 떠나도 되겠구나..
딸이 나에게 한 말이다.
아빠가 얼마나 오빠를 위하고 생각하는지 자신도 미처 몰랐단다. 그저 오빠를 미워하는 줄로만 알았단다. 아빠의 마음을 아들보다는 딸이 더 먼저 받아들였고, 자신이 얼마나 잘못 생각했는지 이미 깨닫고 있었지만, 이번 일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얼마나 오빠가 아빠에게 사랑받고 있는지 자신도 새삼 느껴질 정도였단다.
가족에 대한 남편의 사랑은 참 한결같다.
그러나 아빠가 보내는 사랑의 시그널을 아이들이 받아들일지 아닐지는 또 다른 문제라, 자신의 사랑의 방식을 표현하는 것도 아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이어야 함을 깨닫는다. 때로는 사랑의 시그널을 통제와 억압의 수단으로 받아들여지는 최악의 상황도 벌어질 수 있다.
이번 위기를 통해 우리 가족은 좀 더 나은 가족으로 한 단계 성장했다.
참 감사한 일이다.
2025년 10월 9일
E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