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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Oct 20. 2021

TV와 엄마의 테레비


엄마가 뇌출혈로 입원하신 후 퇴원이 가까워졌을 때 동생은 엄마의 방을 1층에 임시로 꾸몄다. 얼른 회복해서 당신이 쓰시던 2층으로 다시 올라가시기를 간절하니 바라며.

서울로 간 1층의 아들 방을 죄다 치우고 엄마가 우선 필요한 것들을 옮기는 것 외에 할 제일 중요한 일은 엄마의 TV를 1층의 방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엄마와 온종일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은 바로 TV였으니까.      

하체 힘이 없어 아직 잘 걷지 못하는 엄마의 곁에서 간병을 하는 내 몫의 일은 화장실 부축해서 모시고 다니고 식사 시중드는 것, 운동 도와드리는 것 외에 함께 '테레비'를 보는 것이다. 물론 귀가 어두워지신 엄마가 볼륨을 35나 40으로 놓고 테레비에 빠져 계실 때 난 전처럼 거실이나 딴 방으로 가서 책을 읽거나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처럼 내가 시간을 낸 의미가 없을 거 같아 엄마와 함께 있기로 했다. 아마도 몇십 년만의 일일 것이다. 온종일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통신 회사에서 깔아준 선을 통해 들어오는 TV 채널은 100개가 넘었다. 살펴보니 제대로 된 방송을 하는 채널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고 나머지는 홈쇼핑, 재탕 삼탕 방송, 10년 묵은 드라마를 내보내며 사이사이 10분 넘게 광고를 하는 시답잖은 채널들도 있었다.     

테레비를 향해 누워계신 엄마의 침대 곁에 앉아 내가 하는 일은 엄마가 놓치신 드라마 재방 목록을 찾아드리거나 어디 재미난 방송 없나 탐사해서 틀어드리며 함께 보는 것이었다. 병원에 계시면서 자칫 놓치신 드라마 부분을 함께 보며 막장 드라마의 나쁜 인간에게 함께 분개하고 그 흔한 먹방에선 옛날의 음식 이야기 꺼내서 함께 나누는 일이 엄마랑 나누는 일과다.     

 

3주 정도 약국을 쉬며 엄마와 함께 노는 사이 아침드라마 월화드라마 수목드라마, 주말 드라마까지 섭렵을 했다. 그것도 두 번 세 번을 보다 보니 온갖 드라마를 줄줄이 꿰는 경지에 이르렀다. 한두 편만 딱 봐도 대충 그간 줄거리나 짜임새가 눈에 다 들어오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마 내가 지난 일 년 동안 TV 앞에서 보낸 시간과 맞먹을 만한 분량일 거 같다.

늘 종종거리며 저 살기에 바쁜 딸들을 대신해 엄마의 곁을 지켜주고 엄마의 눈길을 가장 많이 받은 테레비, 이젠 자식과 나누는 이야기보다는 테레비의 드라마가 더 친숙하고 그 안의 세계가 일상으로 느껴지는 엄마. 40까지 올라가는 볼륨으로 테레비와 눈을 맞추고 오직 그 안에서 희로애락을 나누며 누워계신 엄마를 보자니 목울대가 쎄 해졌다. 


엄마는 TV를 동네에서 가장 먼저 들여오셨다. 장롱처럼 줄 미닫이 문이 달린 커다란 도시바 TV 였다. 건너 동네 친구 집까지 동생 손을 잡고 '타잔'과 '김일 레슬링'을 보러 갔다가 보지 못하고 울먹거리며 돌아온 우리를 보고 속이 상하신 엄마가 다음날 바로 들여놓으신 것이었다. 우리 동네 1호 테레비였고 그날부터 우리 집은 동네 저녁 마실 집합소가 되었다. 

여름에 테레비는 아예 대청마루에다 내놓았고 아래 마당 평상이 관객석이었다. 그들을 위해 감자를 삶아 내거나 옥수수를 쪄내는 것까지 엄마의 몫이었다. 한창 잘 나가던 국민 드라마 '여로'를 보는 시각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죄다 몰려왔다. 거기 딸린 애들까지 와서 서대는 통에 우리 집인지 동네 회관인지 구분이 안 갔다. "사람 사는 집에 사람이 들어야 좋은 것이니 못마땅해하지 말라."는 말로 엄마는 뾰로통한 내 입을 막으셨다. 그때 내 생각에 천당이 있다면 아마도 제각기 방마다 TV가 있는 곳일 것 같았다.     


연로하신 엄마를 모시고 사는 동생은 엄마의 방에 넓은 화면의 TV를 놓아드렸다. 가끔 저녁에 들러보면 TV는 저대로 나오고 엄마는 엄마대로 주무시고 계실 때가 많았다. 그런 TV 화면의 푸른빛에 드러나는 엄마의 잠든 얼굴을 보면 슬펐다. 마치 제 속살을 다 먹여서 새끼를 길러내고 마침내 빈 껍질만 남은 우렁 같아서. 

엄마는 우리 집에 오시면 불편해하며 곧 가시곤 했다. TV를 거의 켜지 않는 우리 집에서는 당신이 보는 드라마를 크게 틀어서 보시기가 불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딸 사위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엄마는 "책만 읽을 수 있어도 좋겠다"라고 하셨다. 백내장과 녹내장 때문에 즐기던 독서도 접으신 지 오래다. 친구들도 다들 세상을 뜨거나 몸이 불편해져서 모임도 다 없어진 데다가 새로운 정보의 유입 경로도 별로 없다. 늘 바쁘다며 함께하지 못하는 자식인 우리와도 갈수록 공유 부분이 줄어들었다. 테레비를 통해서만 거의 밖을 접하는 엄마의 세계는 테레비 크기만큼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오늘은 테레비를 보시다 잠이 드신 엄마를 보다 중학교에 들어가 내가 처음 접한 영어 단어 'apple'을 발음 기호도 없이 읽어주시던 그때의 엄마가 문득 생각났다. 신기해하는 내게 "많이 접하다 보면 발음 기호 몰라도 어떤 단어든지 저절로 대충 읽게 되는 것"이라고 일러주시던 엄마. 그 엄마와 지금 잠드신 엄마의 사이에는 단지 50여 년의 시간이 가로놓여있을 뿐인데 모든 게 바뀌어 있다.   

난 내일 또 엄마랑 뻔한 드라마지만 보고 또 보고 더러 옛이야기도 꺼내 나누며 지낼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TV는 어떤 의미와 빛깔로 내게 다가오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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