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써 드립니다.
신체적으로 가장 아팠던 적이 언제였는지.. 요
최초의 아픈 기억은 내 오른쪽 종아리 옆 부분에 튀어나온 실 두가닥을 자르는 날이었던 것 같다. 유치원 말고 미술학원에 다녔을 때 즈음이니 대여섯살 정도였을 것이다. 모부는 병명을 모른다. 원인을 알 수 없이 내 온몸이 퉁퉁 붓고 열이 나서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마취를 하거나 수술실에 들어가거나 하는 내용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딱 두 장면만 기억이 난다. 하나는 병실에 누워있는 내가 무릎 부근이 뻐근하고 아려서 다리가 아프다고 엄마한테 이야기하면 엄마가 병원에서 베는 높은 성인용 베개를 내 종아리 밑에 대어주던 장면이다. 나머지 하나는 종아리 옆에 삐져나와있던 두가닥의 실 같은 것을 제거하러 들어갔을 때의 극심한 고통이다. 그 과정이 수술 후 실밥을 제거한 일이었다는 걸 십대 중후반이나 되어서야 알아차렸다. 며칠을 입원해있었는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왜 그 이후에 내 신체는 멀쩡해졌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병원에서의 모든 일은, 내 기억인지 아니면 꿈이었는지 모를 정도로 온통 희뿌옇고 몽롱한데, 그 날 느꼈던 고통만 압도적으로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아프면 서러워진다. 왜 그렇게 울었는지 모르겠다. 그 실밥을 떼어낼 때도 어마무지하게 울었던 것 같다. 내 서러움을 만천하에 알리고 말겠다는 듯이 울어제꼈다. 울음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야만 된다는 듯 엉엉 울었다.
그 다음은 다 폭력에 기반한 고통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토요일인데 깜빡하고 금요일 시간표로 교과서와 준비물을 챙겨간 일이 있었다. 마지막 국민학교 시절이었다. 2학년부터 초등학교가 되었으니까. 학교에 도착해 시간표를 잘못봤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크게 당황했다. 다행히 1,2교시는 금요일과 과목이 겹쳐서 무사히 넘어갔다. 하지만 3교시 즐거운생활 책은 없었다. 1학년이라 옆 반에 가서 빌려도 된다는 요령같은 건 알 턱이 없었다. 선생님은 책이 없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고, 불려나간 나는 처음으로 학교에서 매를 맞았다. 손바닥을 맞았는데 내 살이 타는 줄 알았다. 눈 앞에 번개가 치더니 손바닥에서 불이 났다. 맞은 손바닥에 열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지금 학교들은 그렇지 않을 테지만. 그때 그 선생님은 정말 별로였다. 집에 돌아와 억울함을 토로하자 '그러게 준비물을 잘 챙겼어야지' 정도의 핀잔을 들었던 것 같다. 몽둥이로 맞아도 별 일 아니구나. 어른들의 행동을 보며 그 어린 나이에도 내가 너무 유난인가 싶었다. 내겐 너무 충격적인 일이었는데 왜 다들 이렇게 태연하지?아이들이 캐스터네츠나 트라이앵글, 탬버린을 두드릴 동안 나는 계속 훌쩍거렸다. 수업시간 내내 교실 앞에 우두커니 서서 계속 눈물만 찔끔이었다. 수업에서 완벽하게 소외당했다. 손바닥이 쓰렸다. 계속 엉덩이에 부비는데 불이 꺼지질 않았다. 하지만 소리내서 울질 못했다. 수업에 방해가 될까봐. 단체 생활의 서막이었다고나 해야 할까. 요일을 헷갈린게 그 정도의 잘못이었는지 나는 지금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 별로인 선생님은 끝끝내 나에게 책과 리듬악기를 가져오지 못한 이유를 묻지 않았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뺨을 맞아봤다. 남자 짝꿍이 자꾸 성질을 긁었다. 정확히 싸운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자꾸 자기가 나를 때릴 수 있다고 하는 거였다. 자기는 엄청 세고, 나 하나쯤은 때려서 굴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듯 말하며 나를 깔아뭉갰다. 나는 참을 수 없어서 '너 자꾸 그러면 오늘 아침에 쓰레기 주운 집게로 네 코를 집어버릴거야.' 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짝꿍은 선을 넘었고, 나는 내가 한 말대로 복도의 신발주머니에서 집게를 꺼내와 코를 찝어버렸다. 남자 짝꿍, 이름은 환희였던 것 같다. 인기도 많았던 것 같은데, 다른 친구들이 그 장면을 목도한 것에 분해하며 있는 힘껏 나의 뺨을 때렸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맞았다'의 경험이 재연되었다. 눈에서 번개가 치고, 볼은 얼얼하고 아렸다. 이번만큼은 울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잘못한 게 없었고, 자꾸 재수없게 군 건 그 남자애였으니까. 하지만 너무 아팠다. 그 후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얼굴을 맞은게 처음이었다. 그것도 맨 손으로. 막장 드라마에서는 매회마다 뺨을 때리고, 나아가 김치로 싸대기를 날리는 장면까지 나오지만, 그건 그렇게 흔하게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애는 그때까지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던 내 뺨을 후려갈겼고, 선생님의 권위도 없이, 도구 없이 맨손으로 그것도 동갑내기 남자애에게 얼굴을 맞는 일을 그때 처음 경험했다. 아마, 선생님은 모른 척 했던 것 같고. 나는 별로 안아픈 것처럼 이게 다냐며 그 아이의 폭력을 애써 무시했던 것 같다. 너 따위가 날 아프게 할 수 없어 라는 태도를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했다. 그 아이도 벌겋게 부어오른 내 뺨을 보며 짐짓 놀랐겠지. 그 이후로 짝이 바뀔때까지-일주일간 짝이었으니까-그 아이와 한마디도 안했다. 아마 전학오기 전까지도, 말을 섞을 일은 없었을 거다.
몇 번의 고통이 더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피구를 하다가 공을 얼굴에 맞아 입술이 터져 피로 얼굴이 범벅이 됐던 적이 있으나,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의 걱정을 받아 오히려 관심받아 좋아했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때에는 지들끼리 장난치며 놀던 남자애들 무리중에 한명이 주먹질을 하려고 팔을 뒤로 빼 올렸는데 내가 옆에 서 있다가 광대를 맞은 기억이 있다. 이때 엄청 울었고, 그 친구는 미안하다고 사과를 엄청 했지만 마지막에 맷집이 약하다며 놀렸다. 너무 아파서 별일 아니었는데도 아직도 기억이 난다. 무방비 상태에서 맞아서 그런 것 같다. 거의 인생 고통 세 손가락 안에 든다.
여고 진학 후에는 어디가서 맞고 다니진 않았던 것 같다. 선생님들도 체벌보다는, 하기 싫은 숙제를 엄청 내주시는 편이었다. 깜지라든가, 깜지라든가. 깜지라든가. 더 필사적으로 숙제를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4분단 맨 뒷자리를 좋아했다. 그 자리는 1분단 첫번째 줄부터 숙제검사를 할 때 빛의 속도로 친구의 과제를 베낄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아. 친오빠한테 크게 한번 싸대기를 맞은 적이 있다. 언제였을까. 잘 모르겠다. 중3이나 고2사이였던 것 같다. 딱 한번. 진짜 쎄게. 쓰고 있던 안경이 날아갔다. 뇌출혈 수술 뒤 회복기간이라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엄마에게 내가 재수없게 굴자, 오빠가 그 꼴을 못봤는지. 아니면 자기가 뭘 시켰는데 내가 안들었는지. 여전히 앞뒤 맥락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것도 폭력의 공통점일까. 맞았을 때의 고통은 너무 선연하게 기억이 잘 나는데, 왜 맞았는지. 어쩌다 그랬는지는 잘 기억을 못한다는 것. 잘 모르고 살다가 나중에서야 영화 <벌새>를 보고 나서 '아 그게 가정폭력일 수도 있구나'란 생각을 어렴풋이 한 것 같다. 난 다 그정도의 해프닝은 집에서 일어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겪은 그 일이 스크린 속에서 재연되는 동안 극장의 분위기가 엄청 서늘하고 무거웠다. 아, 다들 맞고 자라진 않았구나. 그때 그일은 폭력이 맞구나. 오빠에게 맞고 나서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남녀의 완력차이를 느꼈다. 한번도 말로 진 적이 없었는데, 말대꾸를 한다고 항상 혼났는데. 그 날은 맞고 나서 아무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한대 더맞을까봐. 한대 더 맞으면 진짜 너무 아플 것 같아서. 입도 뻥긋 못했다. 나를 벽장에 밀친 뒤 오빠가 내뱉는 말들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늘,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지나갔다. 맞고 나서 그 후의 일들은.
그 이후로 성인이 되었고, 작은 체구의 나는 여전히 여기저기서 치이긴 하지만, 더 이상 폭력에 노출되지는 않았다. 살면서 느낀 가장 큰 신체적 고통에 '맞았던 기억'을 쓴다는 건 행운일지, 불행일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괴롭게 아픈 질병이 없었다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드러나지 않는 폭력을 겪으며 자란 사람이 그 고통을 다시 마주하며 건너야 할 절망의 계곡은 너무나 깊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휩싸이고, 목소리를 낼 수 없고, 당연한 것들에서 소외된다. 나는 항상 맞은 뒤에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폭력의 기억에 맞서 목소리를 내는 피해자분들께 늘 감사드린다. 드러내고, 이야기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그 과정을 용감히 거치고 있는 분들께. 또 그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지지자 분들에게도. 그 분들이 있어서 내가 맞았던 경험이 부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뭐 그 정도 일 가지고'하며 부당함도 모른 채 지나갔을 과거의 기억들에서 내 편을 들어줄 수 있게 되었다. 사소한 폭력, 대단한 폭력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는 것도 배웠다.
그런 일들이 별일이어서, 꼭 별일이어서. 누군가 맞았다면 그 일은 꼭 별일이 되어서 정확히 처벌받고 가해자 스스로가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앞으로의 세계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