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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의동 에밀리 Sep 30. 2024

게임 속 세상에서 산책하는 눕눕 임산부

31주 6일

자궁경부 길이가 짧다보니 눕눕 생활이 이어지고 있다.


입원 안 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이긴 한데, 그래도 집에서 내도록 칩거하면 답답할 게 분명했다. 지금은 31주이니, 아이를 완전하게 품으려면 40주차까지 이러고 지내야 한다. 두 달 정도를 누워서만 보내야 하는 셈이다.


집안에서조차 조심조심히 다녀야하기 때문에 밖으로는 거의 한발짝도 안 나가고 지내는 날들이 대부분이다. 한 회사 선배는 본인 와이프도 비슷한 경우였다면서, 나에게 “직립보행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지내렴” 하는 조언을 주기까지 했다. 


침상 안정을 하는 다른 임산부들의 경험담을 찾아보면, 대체로 넷플릭스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컨텐츠를 수동적으로 보기만 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매일 10시간 이상씩을 그런 식으로 지내다 보면 좀 지루할 것 같았다.


게다가 사람이 집에서만 갇혀 있으면 우울해지기 마련이니 대책이 필요했다. 그러다 문득 ‘게임 속 세상이라도 산책하고 다니자’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 - -


다행히 이전에도 플레이하던 RPG 게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원신>! 


거의 <젤다의 전설> 짝퉁 버전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비슷한 게임인데, 무엇보다도 오픈월드 게임이라서 드넓은 세계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게임 캐릭터의 레벨을 올리려고 분주하게 플레이를 했을텐데, 요새는 엄청 느긋하게 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퀘스트 수행 지역으로 이동할 때도, 원래는 지도에 찍어서 거의 GPS 네비게이션 따라가듯 아무 생각 없이 최대한 빠른 경로로 이동하곤 했지만, 요즘에는 지도를 보면서 뚜벅뚜벅 걸어간다. 


또 평소에는 직선 거리의 지름길로 간답시고 절벽을 기어오르거나 행글라이더로 비행을 한다거나 했을 텐데, 요즘엔 그렇게 비정상적인(?) 길 대신에 일부러 진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계단을 이용하면서 다닌다. 


그러다보니 게임 속 마을의 지리가 머릿속으로 쏙쏙 들어왔다. “아, 여기를 가려면 이 건물 뒤로 돌아서 가야 되는구나”하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찻집도 가고, 식당도 가고, 잡화점 들러서 물건 뭐 있나 구경도 하고…….


마을 주민들한테 한가롭게 괜히 말을 걸기도 했다. 예전 같았으면 퀘스트나 보상을 주는 NPC가 아닌 이상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을 텐데, 지금은 시간도 널널하고 애초에 플레이의 목적 자체가 바깥 산책과 타인과의 교류를 하는 기분을 내기 위해서니까. 


 - - -


그게 정말 효과가 있었는지, 일주일 넘게 거의 병원을 빼면 집에서만 있었는데도 답답한 기분이 별로 들지 않았다.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싶다는 본능적인 욕구를 어느 정도 게임 속 세상으로 충당한 게 아닌가 싶다. 아무래도 인류는 대대로 탐사와 모험을 하면서 살아왔으니까.


다만 문제가 있다면 너무 많은 시간을 게임에 할애하고 있다는 점이다. 거의 하루에 네다섯시간은 하는 것 같다. 많아야 한두 시간 정도 플레이하면서 기분전환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책을 더 읽으면 딱 좋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하지만 막상 게임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다. 의외로 컨텐츠가 정말 무궁무진한 게임이었다! ‘퀘스트도 육성도 다 해서 이제 할 게 없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시간을 많이 쏟은 걸까? 게임을 너무 많이 하는 게 아닌지 살짝 염려되지만, 그냥 한 며칠 정도는 ‘내가 또 언제 이렇게 게임하면서 지내겠나’ 하는 생각으로 마음 편하게 플레이해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 글을 편집하고 있는 시점인 만4개월의 아기를 키우는 나로서는 정말 후회 없는 플레이타임이었다. 그 때 시간 아깝다고 게임도 안 하고 지냈더라면 내 평생에 그렇게 마음껏 플레이하며 지내는 시기가 또 있었을까? 특히 육아하는 기간에는 말이다.)


 - - -


여담이지만, <젤다의 전설> 대신 <원신>을 선택한 것은 잘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 


사실 <젤다의 전설> 시리즈, 그 중에서도 <야생의 숨결> 버전이 워낙에 갓겜이다 보니 이참에 열심히 플레이를 해 볼까 하는 고민이 조금 들기는 했다. 하지만 무기가 뻑하면 깨지고 캐릭터 육성도 안 되는 (공격력은 무기로만 때우지, 자체 체력 증강이 안 된다...) 방식은, 나의 조급한 성미에는 역시 좀 안 맞는 것 같다. 캐릭터의 자체 체력 증강은 애초부터 불가능하고, 공격력을 소모품인 무기들로 때워야 한다니.


게다가 <젤다의 전설>에서는 부족한 부분을 현질로 때울 수도 없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맨처음 플레이했을 때 회사 후배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나도 젤다 시작했어! 근데 옷은 어디서 사?”


그랬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사는 게 아니라, 돌아다니다 보면 구해져요.”

“그렇구나. 그럼 무기는? 땅에 떨어진 화살만 주워다 쓰려니 너무 부족한데, 어떻게 사?”

“아니 왜 자꾸 사려고 해요 ㅋㅋㅋ”


 - - -


문득 예전에 봤던 <리아데일의 대지에서>라는 애니메이션이 떠오른다. 주인공은 거의 식물인간 상태가 되어서 현실에서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대신에 뇌파를 이용한 VR MMORPG가 있었기 때문에 게임 속 세상에서는 마음대로 지낼 수가 있었다. 


어차피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인공은 게임 속에서 몇 만 시간씩 보냈다. 그러다 보니 고인물로 거듭났는데, 그 상태에서 섭종(서버 종료)이 되어서 게임 속 세상에 갇혀 버렸다는 설정이었다. 물론 주인공은 엄청난 네임드 유저였기 때문에, 갇혀버린 게임 속 세상에서도 충분히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왠지 그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그나저나 눕눕 임산부 중에서 나처럼 게임을 한다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너무 오타쿠 같은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법이니까. 그러고 보니 태명도 <원신>에 나오는 캐릭터 이름인 ‘카즈하’나 ‘향릉’으로 할까 하고 임신 초기때 잠시 고민했었다. 이 정도면 정말 오타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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