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주 5일
어제는 부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안부 전화일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고과 면담 전화였다. 고과는 평고과였다.
하반기 고과에는 업적평가와 역량평가가 있는데 둘 다 평고과가 나왔다. 솔직히 1년 내내 고생한 것에 비해서 아무것도 보상을 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어서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상반기에는 아직 프로젝트가 끝나지 못해서 결실을 맺지 않았다는 이유로 평고과를 받았었다. 그러나 하반기에 막상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더니 이제는 다른 부서원들도 열심히 일했기에 어쩔 수 없이 상대평가로 평고과가 나왔다는 설명을 들었다.
차라리 뻔한 이유를 들었다면 마음이 나았을 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자네는 올해 초에 승진을 한데다가 하반기에는 임신한 몸이라 다른 부서원들 야근할 때 정시퇴근을 했기에 좋은 고과를 주기가 애매했다’라거나.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얻는 것도 없이 서로 기분만 상할 뿐이니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할 말은 하고 살아야 병이 나지 않는다’라는 주의로 살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이 지면이 대나무숲이라도 된 마냥 이렇게 적어버렸다. 어쩌면 나중에 이 글을 돌이켜봤을 때는 ‘철없이 불평을 늘어놓았네’ 하고 후회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요즘에는 많은 여성들이 결혼과 임신을 이유로 일을 그만두지 않고, 그렇기에 임신 상태로 출퇴근을 계속하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회사를 다니는 임산부 중 한 명으로서, 그 심란함을 오롯이 개인의 문제로 돌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다들 비슷하게 어려움을 겪는구나’ 하는 위안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치기 어린 흑역사를 감수하고서라도 글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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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솔직한 마음으로는 나도 사실 이번에 좋은 고과를 받기는 힘들겠다고 어렴풋하게 짐작은 하고 있었다.
어쨌든 곧 휴직에 들어갈 임산부에게 상위 고과를 주는 것은 회사의 관례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엄청나게 혁혁한 성과를 거두지 않는 이상, 예를 들어서 매출을 몇 백 억을 했다거나 하는, 누가 봐도 “아니 왜 이런 사람한테 보상을 안 줘?”라는 결과물을 가져오지 않으면 말이다.
그래도 그럴 것이면 상호간에 암묵적으로 ‘널널하게 지냅시다~’ 하는 태도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일은 일대로 하고, 보상은 아무것도 없는 한 해였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한대도, 역시
사람인지라 허탈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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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편으로는 사람 성격이라는 것도 무시하지 못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종종 만나는 고등학교 친구들 모임이 있는데, 만날 때마다 하나같이 우리는 ‘쓸데없이 매사에 열심이다’, ‘아무래도 우리 팔자인가 보다’, ‘K-장녀는 어쩔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웬만큼본인 성에 차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는 성격들이었다. 그게 결과적으로 남 좋은 일이 되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정말로 안타까운 근시안들의 모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내 성격을 감안하면, 과거로 돌아간대도 과연 뭐가 달라질까 싶기는 하다. 만약 지금의 평가 결과를 아는 상태에서 연초로 돌아간다면, ‘최대의 효율로 월급 루팡을 하겠다’는 마인드로 회사를 다닐 수 있었을까?
철면피를 깔고 뺀질거릴 수 있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나자신의 직업윤리 때문에 그게 안 될 것 같다.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 눈을 감는다거나, 그런 모습을 남들에게 보임으로써 그 동안 열심히 쌓아놓은 자신의 평판을 사르르 녹여 없애는 상황을 두 눈 멀쩡히 뜨고 지켜볼 수 있을까? (물론 때로는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할 때가 있기도 했는데, 그것은 누군가를 엿먹이고자 하는 분명한 목표 의식이 있을 때 뿐이었다.)
그러니까 아마 모든 것을 알고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똑같이 열심히 회사 생활을 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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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평가와 보상을 떠나서 어찌되었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하루하루를 보냄으로써 스스로 사고방식이나 기술적인 측면에서 성장을 이뤘다고 느낀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덕분에 다른 부서들과 협업을 하면서 성격 좋은 능력자 분들과 소통하며 지낼 수 있었던 것도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배울 점도 많았고, 특히나 그런 분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면 진짜로 인정받은 기분이 들어서 뿌듯하곤 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회사가 나에게 준 보상은 없었지만 스스로 업무를 통해 찾아낸 보물은 있었던 셈이었다.
그리고 고과 외에 포상도 없었기에 하는 이야기인데, 솔직히 회사에서 주는 표창은 글쎄……. 내가 조금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왠지 자체적으로 소꿉놀이 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대통령표창이나 노벨상 같은 게 아닌 이상, 이 사적인 조직에서 자기들끼리 상을 만들고 누구를 선정해서 주고 하는 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무려 신입사원 때부터 있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내가 과장으로 승진할 무렵에는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 어쩌면 그 때 이미 ‘고과 가불’을 한 셈이라고 치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이러나 저러나 상대평가로 인한 스트레스는 어쩔 수가 없고, ‘우리 회사는 능력과 업적에 따라 공정하게 평가한다’라는 항목에 대해서는 여전히 최하 점수를 줄 수밖에 없긴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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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해서 호르몬이 날뛰어 그러는지는 몰라도, 회사를 다니면 다닐수록 모든 게 참 정치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다면 정치판에 아예 뛰어들거나, 적당히 비위를 맞춰가며 내 실속이나 차리거나, 아예 싹 무시를 하고 살거나, 셋 중 하나를 택해야 할 텐데.
지금까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아예 싹 무시를 하는 편이 가장 효율적으로 월급 루팡을 하는 방법처럼 보이기는 한다. 희한하게도 대체로 조직 사회는 오히려 애매하게 순한 사람들보다 그런 정규분포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자들에게 무척이나 관대하니까. 해고를 하지도 않고, 징계를 내리지도 않고 (횡령을 했다거나 누구를 피가 나도록 때렸다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징계 내리는 것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고과에서 하위 평가를 주지도 않으니. 얼굴에 철판 깔고 다닐 자신만 있다면 정말로 좋은 선택지다.
하지만 나는 정치판에 완전히 뛰어들 의지도 없고 자신도 없는데다가, 진정한 월급루팡으로 거듭나는 일은 성격상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결국 남은 선택지는 ‘정치에는 적당히 비위를 맞추면서 내 할 일이나 열심히 하는 것’ 뿐인데. 꼭 임산부나 워킹맘이 아니더라도 과연 이런 나이브한 마인드로 이 험난한 정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