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월 4일
여행기를 읽고 나면 여행기를 쓰고 싶어진다.
오늘은 성수동에 나왔다. 성수동에는 외국인이 많았다. 미국인인가 싶으면 프랑스인이었고, 한국인 중년 부부가 같이 셀카를 찍는 모습을 보고 신기하다 생각하면 중국인이었다. 외국인들이 여행 코스로 아침 산책을 즐기는 곳. 성수동은 그런 동네였다.
성수동에 가려고 아침 9시 반에 지하철을 탔다. 아침 일찍 타는 지하철은 오랜만이었다. 물론 예전 기준으로 치면 이건 아침도 아니었다. 8시쯤 지하철을 타서 출근했으니, 9시 반은 차라리 커피 브레이크 시간에 가까웠다.
그렇게도 싫어하던 출근이었는데. 그런데도 아침 지하철을 타니,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나도 사람이었구나’였다. 남편은 매일 출근을 하고, 복직한 육아 동지들도 출근을 하고, 아이가 없거나 이미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는 동료들도 출근을 한다. 육아휴직급여로 먹고사는 사람은 나 뿐인 것 같았다. 꽁돈이다 하고 즐겁게 소진하면 그만인 것을, 나는 쓸데없이 ‘밥만 축내고 있군’ 하고 자기비하에 빠져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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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아침에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은 몇 없었다. 그 중에서 20~30대로 보이는 어떤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블랙 코트에 샤넬 미니백을 메고 있었다. 환금성 좋은 클래식 플랩백도 아니고, 납작한 깡통처럼 생긴 미니백이라니. 멋쟁이가 아니고서야 선택할 수 없는 제품이다.
반면에 나는 파란색 경량 패딩에 보세 천가방을 메고 있었다. 멋쟁이가 아니기에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다.
그래도 나름 제주도에 홀로 여행 갔을 때 샀던 크로스백이었다. 에코백만 가져가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제주도를 걸어다니려니 자꾸만 어깨에서 가방이 흘러내려서 금방 후회했다. 눈에 보이는 아무 편집샵에나 들어가서, 2~3만원 정도 하는 크로스백을 하나 골랐다. 대충 산 것 치고는 주머니도 많고 편해서 어쩌다 보니 요즘 제일 많이 들고 다닌다.
그 때는 아가가 없었으니, 연차만 내면 사흘이고 일주일이고 훌쩍 제주도에 갈 수 있었다. 남편이랑 같이 가도 되고, 혹은 (그런 적은 없지만) 양해를 구해서 혼자 다녀올 수도 있었다. 그랬던 게 아주 옛날처럼 느껴졌다.
얼마 전에는 남편에게 료칸을 가고 싶다고 얘기했다.
“임신했을 때부터 늘 가고 싶었어. 지금 루나가 만8개월이 됐으니까, 1년 하고도 반 년이 더 되었네.”
그랬더니 남편은, ‘아기는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1박2일로 후쿠오카라도 다녀오는 것은 어떤지’를 이야기했다. 아니, 원래 나는 서울에서 료칸처럼 꾸며놓은 곳을 찾아볼까 한다고 하려 했는데. 하지만 말이 나온 김에 상상해봤다. 1박2일의 일본 여행이라.
…… 자신이 없었다. 이틀 밤낮으로 아이를 남편에게 맡겨두고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면, 남편의 희생(?)을 몹시 황송하게 여겨야만 할 것 같았다. 그만큼 엄청 행복하게 엄청 즐겁게 지내다 와야 할 것도 같았다. 식사도, 료칸도, 홀로 잠드는 호텔의 침구 하나하나까지, 모두 털끝만큼도 실망스럽지 않아야 할 것만 같았다.
후쿠오카에 대해서는 마음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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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섬역에 내렸다.
아무리 성수동을 좋아한다지만, 내가 좋아하는 곳은 성수역보다 뚝섬역이라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성수역 근처는 어쩐지 공장 지대같은 인상이 좀 더 강해서 뭔가 부담스럽다. 당연히 기분 탓이겠지만, 뚝섬역 쪽에는 햇볕도 사람들의 활기도 더 가득한 느낌이다.
마침 차 한 대가 8번 출구 근처에서 정차했다. 어떤 중년 여성 한 분이 내렸고, 곧장 방통대로 걸음을 향했다. 슬쩍 보니 방통대 1층 북카페에도 사람이 많았다. 그러고보니 11월이었다. 기말고사 기간인가? 나도 한때는 저랬는데. 방통대에서 컴퓨터과학 학사 학위를 따려고 공부한 게 불과 몇 년 안 되었건만, 그 사이에 나만 공부를 안 하고 게을러진 기분이었다.
조금 더 걷다보니 이번에는 번듯한 건물 1층에 스타벅스가 나타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사중이어서 복잡했는데, 이제 그 자리에는 근방에서 가장 멀끔한 잿빛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건물 하나가 완공될 때까지 나는 뭘했나, 스스로에게 괜히 물었다. 심지어 무생물에게마저 열등감을 느끼다니. 뭔가 잘못됐다.
주유소 뒤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기억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지만,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도로가 잘 닦여있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아까 뚝섬역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봤던 아파트들과 착잡한 감정이 다시 떠올랐다. 부동산이 지금처럼 비싸지기 전이었다면, 무리를 좀 하더라도 어쩌면 한 채 정도는 살 수 있었을 지도……. 지금은 어림도 없었다. 좋아하는 동네가 번듯해질수록 기분이 씁쓸해지는 경험은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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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어떤 건물 3층에 숨겨지다시피 한 ‘이파리’라는 카페에서 마셨다. 그러고나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2층의 ‘미쁘동’이라는 일식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둘 다 혼자 들어갔고, 들어갈 때마다 ‘이 시간대에는 내가 겁나 첫 손님이겠지……’ 하는 부담을 느꼈다. 하지만 의외로 아침 10시 전에 들어선 카페에는 손님이 절반쯤 차있었고(다들 부지런히 밥을 먹고 온 걸까?), 11시에 간 식당에서는 홀로 개시 손님이었다. 힙한 동네에 혼자 놀러가면 언제나 문전박대를 당할까 걱정부터 하는 편인데, 다행히 그 부분은 기우였다.
일식집에서 지라시 덮밥 같은 메뉴를 먹으며, 창밖을 구경했다. ‘전깃줄만 지하화하면 서울은 한결 더 아름다워질 텐데’ 하고 상상하던 중, 익숙한 노랫소리가 배경음악으로 들려왔다. 고리짝에 들었던 에이브릴 라빈의 <Sk8er Boi>였다.
“그녀는 ‘나중에 봐’ 하고 말았지. 남자가 성에 안 찼거든. (…) 이제 여자는 집에서 애 키우면서 혼자 지내. TV를 켰더니 글쎄, 스케이터 보이가 MTV에 나오네. 친구들은 이미 알고 있었어. 그 남자애 공연을 다들 보러 간대. 여자도 따라가네. 군중 속에 여자가 껴있네. 옛날에 찼던 남자를 올려다보면서. (…) 이제 남자애는 슈퍼스타야.”
노랫말에 ‘Feeding the baby, she's all alone’가 자꾸만 나와서 슬퍼졌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겠지만, 그렇잖아도 집에서 아가 키우며 싱숭생숭해진 아기 엄마들에게 이렇게까지 잔인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이는 귀엽고, 건강하고, 혼자서도 곧잘 놀았다. 이 이상 더 귀엽고, 건강하고……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토록 최선을 다해서 지내고 있는 아가와 함께인데도 어딘가 불안하고, 답답하고,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어지는 나의 감정 상태가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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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리’ 카페는 커피잔이 예뻤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커피잔이었다. 무늬가 들어가거나 올록볼록 요란한 것보다는, 호텔 조식에서 볼 법한 흰색의 민무늬 카푸치노 잔을 좋아했다. 사진을 찍으니 역시 깔끔하게 나왔다. 창가 자리라 햇빛이 들어서 더 그럴싸했다.
취향을 고민하고 가꾸던 게 아주 먼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며칠 전에는 오후에 아가를 친정 어머니께 맡기고서 집 근처 마트에 갔었다. 웬일로 몸이 평소처럼 피곤하지 않아서 오랜만에 이 코너 저 코너를 기웃거리며 호기심에 구경을 해봤다. 정육 코너에서는 업진살과 부채살이 할인 중이었다. 아가가 태어나기 전에는 남편이랑 마트에서 소고기를 사다가 저녁에 상추 쌈을 해먹기도 했는데, 그것도 최소 1년은 더 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어쩐지 여유가 없어진 나날들이었다. 최근에 갔던 친구의 결혼식에서 먹었던 뷔페 식사도 그랬다. 예전 같았으면 ‘뭐가 맛있을까?’ 하면서 음식을 골랐을 텐데, 이제는 나도 모르게 기준이 바뀌어 있었다. ‘내가 이걸 언제 또 먹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글쎄……’가 떠오르면 냉큼 집어들었다. 육회나 사시미 같은 신선식품들이 접시에 채워졌다. 밥 한 술 떴다가 아가 챙겼다가 하는 평소의 식사에서는, 상온에서 상하기 쉬운 음식들은 사치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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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늘 쫓기고 시간이 없는 기분이 드나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백일 때만 해도, 아가는 수유 사이사이에 잠을 두 번씩 잤다. 그것도 1시간 남짓씩 잤고, 한 번 깨어있는 시간은 30분 정도가 고작이었다. 반면 지금은 잠을 한 번씩만 잔다. 1시간 남짓 자는 것은 여전하지만, 그렇게 자고서 일어나면 2시간 반에서 3시간을 내리 깨어있다. 심지어 요즘에는 오후 3시에 밥을 먹고 나면 오후 7시 반까지 스트레이트로 깨어있기 때문에 낮잠 횟수마저 줄었다.
그러니까 양육자의 입장에서는 쉬는시간이 하루 1~2회로 줄어든 셈이었다. 오전의 아이 낮잠 자는 시간 1시간에는 설거지며 유모차 정리 등 집안일을 이것저것 마치고 나면 30분 정도밖에 여유가 남지 않았다. 화장실 갔다 와서 책 몇 글자 읽고 나면 금방 사라지는 시간이었다.
오후의 낮잠 시간에는 집안일을 얼추 끝낸 다음에 나도 아이의 싱글 침대에 들어가서 30분 정도 낮잠을 잤다. 아무래도 육아는 육체노동이라서 그런지, 하루 한 번은 이렇게 낮잠을 푹 자야 그래도 힘이 좀 생겼다. 하루는 이 시간이 조금 아까워서, ‘어디 한 번 그냥 낮잠 안 자고 버텨볼까?’ 하면서 건너뛰어봤다. 그랬더니 저녁 무렵이 되자 도저히 안되겠어서 친정 어머니께 아이를 맡기고 잠을 청했다.
알집매트에 그대로 누웠다. 친정 어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아기방과 서재를 오가며 구경을 시켜주셨다. 아이는 꺅꺅 소리를 내며 할머니와 놀았다. 이렇게 시끄러운데 잠이 들 수 있을까? 걱정이 무색하게도, 어느새 나는 꿈까지 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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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집에서 혼자 아이를 하루종일 보는 게 벅차게 느껴졌다.
아이 이름을 지어주자마자 대기 신청을 걸어둔 어린이집에서 얼마 전 연락이 왔다.
“내년 3월에 입소 가능하신데, 하시겠어요?”
아이는 2월생이었고, 내 목표는 적어도 돌까지는 가정보육을 하다가 어린이집을 보내는 것이었다. 모호하게나마 의사표현을 좀 하고, 걸음마 수준일지라도 걷기가 가능하다면. 최소한 그 정도가 되면 조금은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의학적으로는 발달단계상 두 돌까지는 집에서 데리고 있는 걸 추천하는 것 같은데, 이러나 저러나 각 가정의 필요에 따라서 보내면 된다는 말이 꼭 뒤따랐다.
복직과 육아 노동의 강도를 고려했을 때 두 돌은 너무 멀고, 백일 이렇게는 내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 타협점을 찾은 게 ‘돌까지’라는 목표였다. 그러던 중에 가정보육이 점차 힘에 부치게 되었고, 마침 어린이집에서 입소 가능여부를 물어왔기에 일말의 고민도 없이 “네!”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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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에서는 아이를 어떻게 볼까?
궁금했다. 나는 한 명 돌보기도 이렇게 어려운데, 대체 무슨 수로 한 명의 선생님이 세 명 내외의 아이들을 동시에 보는 걸까? 친정 어머니께 여쭤봤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대충 보는 거지 뭐.”
그렇구나. 대충 보면 되는 거구나.
‘대충’이라고 해서, 말도 안 되는 보육을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를테면 말을 안 듣는다고 머리를 쥐어박는다든지, 밥 먹다가 운다고 아예 굶겨버린다든지, 그런 터무니없는 식의 돌봄은 아닐 것이다. 다만 집에서처럼 마룻바닥에 쪽쪽이가 굴러버렸다고 바로 새것으로 교체해준다든지, 지루해하며 운다고 비행기를 슝슝 태워준다든지, 기저귀를 정해진 시각마다 체크하는 게 아니라 수시로 확인하고 갈아준다든지, 그러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어쩌면 스스로 너무 엄격한 케어 수준을 기준으로 잡아둬서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충 키우면 또 그 나름대로 크는 게 아이일 텐데 말이다. 돌이켜보면 아이가 울 때마다 긴장했던 것 같다. 오래 울리고 싶지 않아서, 더 강성울음으로 펑펑 눈물 쏟게 하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울음을 그칠 수 있을지 노심초사하며 고민했다. 특히 그렇게 아이가 우는데 주위에 도와줄 사람이 없을 때 더욱 애가 탔다. 화장실에 다녀와야 하는데 울고 있을 때라든지, 목욕 후에 옷을 입혀야 하는데 피곤하고 걸리적거린다며 왕창 울 때라든지…….
하지만 아이는 아이니까, 울지 않을 수는 없었다. 태어난 지 7~8개월밖에 안 된 아기가, 피곤하다고 해서 “어머니. 피곤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점잖게 물어볼 리는 없었다. 아이 울음소리에 너무 겁먹지 말고, 그냥 ‘말을 좀 크게 한다’라고 여기라던 <삐뽀삐뽀 119>에서의 조언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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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면 나처럼 가족의 도움을 꽤 받는 케이스는 의외로 적은 것 같았다.
친정 어머니도 자주 와 주시고, 남편도 아침저녁으로 아이 돌보는 데에 최선을 다한다. 한편으로는 한부모가정처럼 타인의 도움 따위 일절 받지 못하는 양육자들도 있을 텐데,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아이를 돌볼까 싶기도 했다.
아무래도, 반드시 일대일 밀착 케어로 애착 육아를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프랑스 아이처럼>이라는 책에서는, 미국에서 이른바 ‘집중 육아’가 트렌드가 되고 나서부터 육아 스트레스가 전반적으로 심해졌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고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이가 너무 울어서 힘들 때는 이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지금 미혼모다’라고 말이다. 진짜 미혼모인 분들이 보면 불쾌한 부분이겠지만, 몇 번 해보니까 이런 마인드 컨트롤은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그 문장 안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울어도 어쩔 수 없음’, ‘할 일은 해야 함’, ‘이게 최선임’ 같은 것들 말이다. 그 문장은 내게, ‘방금 스스로 내린 육아상의 선택과 그에 따른 행동에 크게 신경 쓰지 말 것’이라고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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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주양육자이다 보니, 혼자 아이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닐 일이 많았다.
11월 마지막주에 접어드는 지금이야 아침 기온이 3도 안팎이 될 정도로 추워졌지만, 그 전에는 어린이대공원도 종종 다녔다. 날씨가 좋았던 어느 주말에는 ‘지금이야!’ 하고 급작스럽게 결정을 내려서 유모차를 밀고 가기도 했다. 남편은 주말 특근 때문에 집에 없었으므로, 아이랑 어린이대공원이라도 다녀와야 주말을 뜻깊게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별다른 준비 없이, 가는 길에 김밥 한 줄만 덜렁 사가지고 공원에 들어섰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았다. 다들 가족 단위였는데, 그 사이로 돗자리도 없이 나무 데크 위에 털썩 앉았다. 왼손으로는 아이를 품에 안고, 오른손으로는 은박지에 싸인 김밥을 들고 마치 소세지 까먹듯이 먹었다. 아이에게는 김밥을 포장해 온 검은 비닐봉지를 주었더니, 멀쩡한 치발기는 제쳐놓고 역시 비닐봉지에 열중했다.
주말에, 돌도 안 된 아기를 데리고, 돗자리도 없이 홀로 앉아 김밥을 먹는, 30대 초반의 여인. 어쩌면 남들이 보기에는 사연 있는 여자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어머 어떡해, 미혼모인가봐. 형편이 어려워서 점심은 김밥으로 때우고, 아이는 비닐봉지를 가지고 노네. 그래도 아이를 데리고 주말에 공원 산책을 나오다니, 씩씩하네…….
비닐봉지도 그렇지만, 김밥도 오해인걸. 실은 이웃 블로거의 포스팅을 보고, ‘나도 언젠가 김밥 한 줄 사서 아이랑 나들이 다녀와야지’ 했던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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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는 아이를 데리고 장난감 도서관에 다녀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에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유모차를 밀었다. 골목 어디에서 차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이 쪽에서 방어운전을 하는 게 최선이었다.
긴장하며 길을 걷고 있는데, 마침 골목 사거리에 접어들었을 때 맞은편에서 승용차 한 대가 다가왔다. 직진해서 내가 있는 곳으로 오려나? 아니면 좌회전이든 우회전이든 방향을 틀어서 가려나? 가늠하고 있었는데, 우측 깜빡이를 켜고는 코너를 돌았다. 요즘 시대에 깜빡이를 사용할 줄 아는 운전자라니, 흔치 않게 매너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회전하다가 좁게 돌았는지, 바퀴가 보도블럭 옆구리를 긁으며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매너는 있지만 운전 실력은 없나 보군……. 하긴, 그래도 매너와 운전실력이 둘 다 꽝인 것보다는 훨씬 낫지.
그런 시덥잖은 저울질을 하고 있자니, 이런저런 고민거리들이 하나 둘 밀려들어왔다. 요즘 들어 아이를 옆에 데리고 싱글 침대에서 잠들 때 오히려 잠이 더 잘 오던데. 아무래도 분리불안은 아이가 아니라 내가 겪고 있는 걸까? 불면증을 해소하려면 역시 따끈하고 조그마한 아기를 곁에 두고 자는 편이 좋으려나? 따지고 보면 아이가 ‘따끈하고 조그마한’ 시절은 기껏해야 5년 남짓일 텐데, 그 귀한 시간을 수면교육 한답시고 허공에 날리는 게 나중에 아쉬울 일을 만드는 것은 아닐지…….
아니, 그래도 이제는 침대 문제를 고려해봐야 한다. 이미 슈퍼싱글 침대를 들인 이상, 패밀리침대를 사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싱글침대에서 아이 곁에 낑겨서 자든지, 아니면 침대 옆에 요를 깔고 자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침대 옆에 요를 깔면, 먼지도 먼지지만 ‘따끈한 아이를 바로 옆에 두고’ 자는 게 반감되니까 의미가 좀 퇴색된다.
그나저나 무슨 선택지를 고르든 간에, ‘애가 아니라 부모가 서로 분리되는’ 분리수면이 되는 것도 문제다. 뭐, 일단은 지금 체제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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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은, 아이 없이 홀로 성수동에 놀러왔다.
그런데 카페도 갔고, 식당도 갔으니, 이제 뭘 더 해야 할까. 벌써 집에 돌아가기에는 조금 아쉬웠다. 아니, 집에 가는 것 자체는 사실 좋았다. 아직 12월도 아닌데, 날이 너무 추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집에 가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집안일들이 눈에 선했다. 주5일 내리 서 있었던 설거지통 앞으로, 벗어날 수 없는 노동 속으로 다시 끌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고민이 되고 울적할 때는 걸어야 한다던 말이 떠올라서 일단 걸었다.
발걸음이 닿는대로 걷다 보니 서울숲이 나왔다.
성수동도 성수동이지만, 그 중에서도 서울숲이야말로 외국인 천국이었다. 중국인, 프랑스인, 미국인, 그리고 내가 모르는 나라 말을 하는 사람들까지……. 물론 한국인이 압도적으로 많기는 했다. 근처에 갤러리아 포레도 있고 하니까 유명 연예인도 잘하면 마주칠 법 한데, 실제로는 당연히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놓고 보니까 다들 평범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내가 무명의 일반인인 것처럼, 그 넓은 숲에 모인 이들이 전부 다 한국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자기 자신이 평범하다는 의식 때문에 우울해하고 있던 게 문득 떠올랐다. 이 사람들도 평범한데, 그럼 이 모든 사람들이 우울해야 마땅한 사람들인가? 심지어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중년의 방문객들도 많았다. 그 분들에 비하면 나는 앞으로 인생을 더 특별하게 가꾸어 나갈 수 있는 여지가 많은 편일 텐데. 그런데도 나는 우울해하고 있으니, 저 분들은 ‘반드시’ 울적하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겠네?
그렇게 조금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질문들을 마주하고 보면, 당연하게도 나는 ‘객관적으로 봐도 우울해야만 하는 처지’는 전혀 아니었다. 그래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답답했다. 지나가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모습은, 예전에 외국어를 배우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프랑스에 가면 “봉주르”를 할 줄 알고, 그 뒤에 덧붙여서 “바게트 한 개 주세요”도 할 줄 안다. 중국에서는 영어가 안 통하는 만두집에서도 만두를 시켜 먹고, <별에서 온 그대>를 재밌게 봤다는 택시 기사님의 입담에 맞장구를 쳐드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영어를 쓰지 않는 영문학사, 코딩을 하지 않는 컴퓨터과학사일 뿐인 것을.
그래도 걷는 것은 울적한 마음에 정말로 도움이 되었다. 경량 패딩에 달린 모자까지 뒤집어써야 하는 추위 때문이었다. 찬바람에 체온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잔뜩 움츠리며 산책을 다녔더니, 집에 와서는 몸이 몹시 노곤노곤해져 있었다. 그 상태로 타이밍 좋게 아이의 오후 낮잠에 동참했다. 역시 아이는 따뜻했고, 작았고, 숨소리는 새근새근 귀여웠다.
나른한 낮잠이 고민을 덮어버렸다. 아무튼 오늘은 이렇게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