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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개미 Sep 14. 2023

창 밖 풍경

비엔나에서 10개월 남짓 지내는 동안 나는 U반(말하자면 전철)이 창문 옆으로 지나는 원룸에 살았다. 입국시기에 맞춰 바로 지낼 공간을 찾다 보니 실제로 방문하지 않고 계약을 한 게 화근이었다. U반과 가깝다는 전 세입자의 말은 교통이 좋다는 의미보다 실제적인 거리를 의미했음을 도착한 후에야 알게 됐다. 이미 전 세입자는 퇴거한 상태라 관리인과 함께 방에 들어섰을 때 열린 창문 너머로 우렁차게 지나는 U반 소리를 듣고 '망했다'는 생각을 했다. 건물 앞쪽으로 막힌 공간이 없기에 창문은 꼭 닫고 다녀야 한다는 관리인의 설명은 나를 더 겁먹게 만들었다. 창문을 닫지 않은 채 외출을 하면 집에 못 들어올 수도 있다고 했다. 그만큼 바람도 많이 들이치는 구조였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건너 방 사람은 편리한 교통에 조용한 주거환경을 가졌을 거라 생각하니 과거의 나의 선택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아쉬운 마음은 뒤로하고 짐을 풀었다. 다행히도 첫 우반소리의 충격에서 벗어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창문을 닫으니 생각보다 U반 소리가 크지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첫 만남의 강렬함은 사소한 변화에도 감동하게 만들었다. 나중엔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물 위로 지나는 기차소리 같았다. 실제로 햇살 좋은 날 침대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지나는 우반소리가 꽤나 평화롭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이따금 그 U반소리가 그리운 걸 보면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미화될 수 있는지 신기할 뿐이다. 


사는 동안 하루종일 부지런히 오가는 U반소리가 종종 나의 신경을 건드렸지만, 창 밖 파란 하늘과 햇볕을 매 순간 마주할 수 있는 건 큰 행운이었다. 한국이었다면 앞 집 창문에 보이지 않게 커튼을 치고 살았을 텐데 다행히도 건너편 건물은 내가 사는 건물보다 높이가 낮아 하늘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반대로, 지나다니는 우반에서 올려다볼 수 건물이었기에 한국에서 가져온 글씨 연습용 화선지를 오려 아래 창문 칸에 붙여주었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검정 블라인드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하늘부터 가려지는 것이 싫어 자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이케아에서 욕실용 커튼봉과 식탁보용 레이스를 구매해 창문 높이에 맞게 걸어주니 레이스 틈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독일식 창문(Tilt&Turn)은 옆으로 여는 한국식 창문(미닫이)과 달리 앞으로 당겨서 열거나 네모난 창문의 윗부분만 열 수 있는 2가지 구조로 되어있다. 환기를 제외하고 대부분 윗부분의 창문만 열어놓고 지냈는데, 시야를 가리지도 않고 비가 와도 빗물이 들이치지 않아 사시사철 창 밖 풍경과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유럽도시 속 나의 작은 공간이라 여겼던 원룸은 코로나19로 나의 세계가 되었다. 창 밖 너머로 나갈 수 없는 시기엔 창문을 망원경 삼아 세상을 보았다. 규칙적으로 오가던 우반의 소리가 잦아들었고, 이따금 지나는 우반을 들여다보며 몇 명이나 탔나 헤아려보곤 했다. 건너편 건물은 박람회장 같은 곳이었는데 사람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코로나의 첫 고비가 지났을 무렵 서너 명의 사람이 건물 밖에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본게 내가뚜렷하게 기억하는 그곳 모습의 전부다. 


나의 세계에서 나는 하늘을 감상하고 노을을 구경하는 일을 하며 지냈다. 아침 햇살의 미묘한 온도, 대낮의 뜨거움, 초저녁의 뜨뜻한 온기는 매일 느껴도 새로웠다. 시계 없이 자연을 통해 하루를 느긋이 지나는 즐거움은 의도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코로나여서 가능했던 일상의 일탈이었다. 

혼자여행 하며 만난 숙소에서 내가 살고 싶은 풍경을 얻고는 한다. 비엔나에선 '독일식 창문과 하늘과 햇빛이 잘 드는 탁 트인 공간'이 추가됐다. 지금의 나는 시트지가 붙어있는 빌라 2층에 살고 있지만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나의 미래를 현실에 비추어 잃고 싶지 않다. 


코로나 해제로 시작된 '일상으로의 복귀'라는 말은 나에게 큰 즐거움이 되지 못했다. 모든 걸 할 수 있는 시기이지만 무언가 자연과 나 그리고 여유에서 멀어진 기분이다. 자연은 그대로인데 나는 변했다. 자연 속 작은 소리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그때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지금의 나의 삶이 일상으로의 복귀인지 단절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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