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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개미 Sep 20. 2023

계절바람

사시사철 변하는 나뭇잎이 창 밖으로 흩날리고 아침저녁으로 새가 재잘거리는 집에 살았다면 더없이 좋으련만 빼꼼히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면 보이는 건 전봇대뿐인 집에 산다. 자연과 가깝지 않다는 건 그만큼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기 어려워짐을 의미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집 앞 공터에서 맹꽁이 소리가 들리고, 어지러이 자란 풀 사이에서 아이들이 뛰놀곤 했는데 이제 집 주변은 빌라로 가득 찼다. 흙길은 물론 나무도 보기 어려운 비계획동네에 산다. 땅주인이 얼마나 많은가 싶을 만큼 골목은 이리저리 굽어있고,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어 있지 않기에 골목마다 비행기 활주로마냥 길 가장자리를 따라 LED 유도등이 깔려있다. 빌라와 빌라 사이를 지날 때면 보이는 건 나무가 아닌 전봇대, 이따금 불 꺼진 집에서 개 짖는 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온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나는 자연이 많은 나라 혹은 동네로 여행 떠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들의 북적거림에서 오는 에너지보다 자연 속에 스며든 숲의 생기를 선호한다. 어느 나라를 가든 공원을 찾아 가만히 앉아 오래도록 숨 고르는 시간을 갖는다. 잔디에서 발을 구르고 바람을 따라 빛이 들락날락거리는 나무를 바라본다. 


요즘 삶의 낙(樂) 중 하나는 전기자전거를 타는 일이다. 일을 마치고 집에 갈 때 버스 대신 자전거를 탄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지나 숲 길 초입을 지날 때면 선선한 바람을 따라 짙은 풀내음이 느껴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페달을 구르지 않고 전기자전거에 몸을 맡긴 채 아주 잠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볼 때 찰나의 자유로움이 주는 쾌감이 최고조에 이른다. 피부를 스쳐 지나는 바람 속 풀 냄새, 파란 하늘과 짙은 녹음은 언제나 환상적이고 아름답다. 집까지 이 행복이 유지되면 좋으련만 집 근처는 전기자전거 반납이 불가한 지역이라 가까운 전철역에 자전거를 반납하고 집까지 걸어간다. 10분 남짓 걷는 동안 나의 즐거움도 이내 사라져 버린다. 


자연과 가까이 살지 않지만 다행히도 누구나 계절을 느끼기 좋은 시간이 있다. 

바로 이른 새벽이다. 태양의 에너지가 지구 표면에 닿기 전 불어오는 바람에 계절의 시간이 담긴다. 그곳이 어디든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바람에 계절이 묻어난다. 계절마다 바람의 결이 다르다. 싱그럽고 희미한 풀내음이 느껴지는 봄과 달리 여름 바람은 어느 때보다 물기를 많이 머금고 있다. 비가 오기 전 바람은 물방울을 머금은 듯 묵직하면서 촉촉하다. 후두둑 빈틈없이 비가 쏟아질 때면 바람은 빗방울을 따라 현란한 자연의 교향곡을 만들어낸다. 비가 그치면 흙과 풀에 스며든 바람이 차분히 땅을 감싼다. 그렇게 가을로 들어선다. 높아진 하늘만큼 바람의 깊이도 깊어진다. 가벼이 휘이- 지나지 않고 땅의 결실을 끌어안는다. 뜨겁고 찬란했던 순간을 뒤로하고 차가운 바람이 모든 걸 덮는 순간이 온다. 익숙해지고 싶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겨울바람은 늘 시리고 아프다. 부산스럽지 않은 이른 새벽이야 말로 바람이 가장 싱그럽고 맑다. 온몸으로 새벽의 공기를 자주 느낄 만큼 부지런하지 못하기에 늘 내 방 창문은 조금 열려있다. 그렇게 아침을 맞는다.  


계절과 계절사이, 바람은 마중물이 되어 계절을 이끈다. 

킁킁거리며 바람에서 계절을 읽고 시간을 읽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계절을 느낀다. 

숨쉬기가 나의 취미인 이유가 여기에 있나 보다. 깊이 들이마시고 깊이 내쉬는 행위만으로도 이 계절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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