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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개미 Sep 28. 2020

005. 지레짐작하다

안녕하세요,하다씨

유가족, 이 단어를 들으면 누가 먼저 떠오르는가.
나는 먼저 세월호가 떠오르고 지병으로 부모님 중 한 분을 먼저 떠나보낸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직 직접적으로 경험해보지 못한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해 나는 이제껏 지레짐작으로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왔다.

KBS 교양 프로그램인 거리의 만찬에서 ‘자살 유가족’을 주제로 방송했던 적이 있다.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살을 나와 거리가 먼 다른 세상의 이야기로 생각하기 쉬운데 1명의 자살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이 130명이라는 조사 결과를 듣고 꽤나 충격을 받았었다.
가까운 지인은 아니지만 내 주변에도 자살 유가족이 있다. 지병 혹은 갑작스러운 불의의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의 가족을 뜻하는 자살 유가족은 일반 유가족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용어가 낯설 뿐, 인터뷰로 참여한 그들이 누구보다도 더 큰 상실감과 괴로움 속에 머물고 있음을 방송을 보며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아는 지인은 가족의 자살을 2번이나 겪어야 했다. 가족의 죽음 이후 2-3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여전히 의욕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그의 소식을 들었을 때 ‘이제 좀 털어낼 때도 되지 않았나.. 언제까지 그렇게 살려고 하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오만하게도 그의 슬픔의 깊이를 발목을 적시는 냇가 물 정도로 여겨왔던 거다. 전파를 타고 흘러나오는 디지털 영상을 보며  훌쩍이는 나의 모습에 인간의 위선을 발견하고 말았다. 남 욕할 거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이 나였던 것이다.

부끄러웠다. 그를 놀라운 사건의 주인공으로 생각했을 뿐 깊이 애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 나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시 [방문객]의 일부가 떠올랐다. 사람이 오는 일이 이리도 대단한 사건이라면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 역시 커다란 사건이 분명하다.

누군가의 생의 마감을 배웅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느닷없이 찾아오지만, 그 마지막 인사가 자살이었을 때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인터뷰에 참여한 한 자살 유가족은 남편의 죽음 이후 오랜만에 지인을 만난 장소에서 미소를 보이자 지인으로부터 ‘웃어요?’라는 가시 돋친 말을 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그 후로 ‘자신은 웃을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오랫동안 괴로웠다는 말을 듣고 내가 타인의 슬픔에 쉽게 반응한 적은 없는지 돌아보게 됐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놓인 연못 혹은 슬픔의 강, 아니 한 사람의 마음속 평생 일렁일 감정의 바다의 깊이를 우린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내가 무심코 건넨 말 또는 위로라고 건넨 격려의 말들이 오히려 거친 풍랑이 되어 이제 막 잠잠해지기 시작한 누군가의 감정을 다시 소용돌이치게 만들지도 모른다.

우리의 위로로 거친 파도를 잠재울 수 없다. 고요는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으로부터 시작된다. 판단은 나의 범주에서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에 불과하다. 위로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하는 무책임한 만들에 담아낼 수 있는 진심의 크기는 과연 얼마나 될까.
슬픔을 마주한 이를 발견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침묵이다.

곁을 지키는 방파제가 되어 누군가의 슬픔이 산산조각 부서질 때까지,

다시 본래의 고요한 바다로 돌아갈 때까지 함께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일지도 모르겠다.



190922/20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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