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게으른개미 Sep 27. 2020

004. 미련하다

안녕하세요,하다씨

우리는 일상기술자다.
일상기술자란 일상 속에서 본인이 터득한 기술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뜻하는데 이 글을 쓰며 지은 나만의 용어이다. 짓고 보니 그럴듯한 느낌이 든다.
전문적인 기술이 아닌 일생생활에 굳이 안 해도 되는 것들을 본인만의 기술로 행동하는 사람, 나는 일상 기술자다.

내가 잘하는 일상 기술 중 하나는 발가락으로 물건을 집는 일이다. 부디 더럽다 생각 마시길.
사람이라는 게 얼마나 미련한지 한 뼘만 가까워지면 되는 것을 굳이 힘들여 행동한다.
가령 바닥에 종이나 휴지가 떨어져 있으면 허리를 굽히는 대신 첫 번째와 두 번째 발가락을 펼쳐 집어 든다. 그리고 운동이라 생각하며 고관절을 유연히 접어 물건을 손으로 옮기거나 쓰레기통으로 휙 던진다. 열에 여덟은 성공하니 성공률 80%이지만 엄연히 따져보면 20%라는 높은 실패율을 가지고 있다.
허리를 굽혀 손가락으로 집으면 성공률 백 프로, 실패가 없기에 시간과 체력을 아낄 수 있는 탁월한 행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굳이 실패할지도 모를 불필요한 일상 기술을 지속 발전시키고 있다.

우리 집엔 에어컨이 없다.

에어컨을 구매해야지 생각하면서도 매년 우리 가족은 방 하나에 선풍기 하나씩 놓고 여름을 지낸다. 옛날부터 사용해온 제품들이라 정지가 되지 않거나, 요란한 바람소리를 내는 등 고질적인 문제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모두 수동으로 버튼을 누르거나 손잡이를 돌려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지만 시원한 바람들 만든다는 제품의 기능에 이상이 없어 여전히 잘 사용하고 있다.
바람세기를 바꿀 때는 물론이고 회전에서 정지로 바꾸기 위해 나는 굳이 두 발가락으로 손잡이를 돌리기 위해  에너지를 쏟는다. 이내 힘이 빠져 어중간하게 놓일 때면 한번 더 발가락에 힘을 주어 끝까지 돌린다. 마치 발가락 힘 테스트를 하는 듯이 말이다.
이 미련함은 신발을 신고 난 후, 두고 온 물건을 찾으러 갈 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한쪽 발의 신발만 벗고 쿵! 쿵! 소리를 내며 이동하거나 굳이 무릎을 구부리고 이동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한다. 편리함과 높은 효율성을 추구하는 시대에 이런 미련함이라니, 간절함도 이런 간절함이 있을까 싶을 만큼 이상한 데에 에너지를 쏟아낸다.

TV 예능 프로인 ‘집사부일체’에 박진영이 사부로 나와 시간 단위로 쪼갠 자신의 일상을 공개했었다. 옷 고르는 시간이 아까워 같은 옷이나 고무줄 바지를 입고 밥도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며 화장실 가는 시간도 정해놓은 그의 모습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그가 만약 나를 본다면 “참 미련하게 사는군요”하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지도 모른다. 효율을 중시했다면 우리 집은 에어컨을 샀거나 리모컨으로 작동하는 선풍기를 썼을 것이다. 애초에 종이가 떨어지지 않게 주의했을 것이고 신고 벗기 쉬운 신발을 착용하여 어느 순간에도 유연하게 대처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효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 나는 쓸데없는 것에서 만족감을 얻는 미련한 사람이다.

스탠드 불을 끄기 위해 스탠드 스위치를 향해 어깨가 뽑힐 정도로 손을 뻗는 1센티의 간절함
퓩-퓩- 바람소리만 터져 나오는 세제 펌핑기를 10번이고 20번이고 눌러 설거지를 마치고 말겠다는 의지
자꾸만 미끄러지는 질소과자봉지 끝을 잡고 깔끔하게 뜯겠다는 굳은 결심
터지기 직전의 쓰레기봉투를 꾹꾹 눌러 매듭을 짓고 말겠다는 다부진 손놀림
끝내 쓰레기봉투의 옆구리가 터질 때면 노란 박스테이프를 붙이며 ‘이럴 줄 알았어’하고 껄껄거린다.
 
우리 삶에는 조금 미련하게 행동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쾌감이 있다.
오기와 괜한 호기심이 만들어낸 쾌감은 편리함이 주는 편안함과 다르다. 번거로움이 만든 기쁨은 사소하지만 거대하다.

개인의 거대한 성취조차 타인보다 못하다고 저평가되는 이 세상에서 나만 알고 느낄 수 있는 성취가 있다는 것이 기분 좋지 않은가! 실패할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전하는 이 무모함,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일이라서 더 좋다.
성취감은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다. 성취감은 무엇이든 내가 달성하고자 했던 것을 이루었을 때 느낄 수 있다. 작은 성취의 반복이 한 번의 커다란 성취보다 내 삶을 더 즐겁게 만들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일상의 작은 기술에서 느끼는 성취감에 사회적인 성취가 더해진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남에게 내세울 것 없는 일상 기술, 자랑 축에도 끼지 못할 이 미련함은 나를 위한 나만의 능력이다.
당신을 기쁘게 할 미련함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다.



190920/200926


매거진의 이전글 003. 다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