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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Sep 10. 2024

글쓰는 몸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문심조룡 세미나 발제문(42양기 - 45시서)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글쓰기는 운동과 비슷하다 꾸준히 쓰다 보면 체력이 붙듯 자연스레 실력이 는다. 운동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글쓰기를 운동에 비유하는 게 웃기지만, 무튼 경험상 저 말은 사실이다. 아울러 400자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는데, 글쓰기에 호흡이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비유하기를, 400미터를 전력으로 달릴 수 있으면 점점 실력을 키울 수 있으나 300미터에서 멈추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억지로라도 400자를 채우라고 이야기한다. 내키는 대로 쓰는 것보다 400자 안에서 자신의 글쓰기 리듬과 호흡을 찾기 바라는 까닭이다. 


<문심조룡>에서 <양기養氣>를 이야기하는 점이 흥미롭다. "지기가 왕성하면 생각도 예리하고, 힘든 것도 못 느끼지만, 체기가 쇠약하면 깊게 사고하면 정신이 힘들어지는데, 이는 일반인의 보편적인 자질이자, 나이의 많고 적음이 만들어내는 대략적인 정황이다." "문의가 성숙하면 붓을 들어 정회를 서술하고, 문사가 막히면 붓을 내려놓고 사색을 멈춰야 한다. 유유자적함으로 피로를 없애고, 담소로 권태를 몰아내는 약으로 삼아야 한다." 요컨대 너무 끙끙대며 글을 쓰지 말라는 말이다. 글쓰기가 신체적인, 정신적인 건강과 연관되어 있는 까닭이다.


유협은 장자, 맹자를 참조하여 '기氣'를 이야기한다. 기를 해치면서, 기를 설하면서 글을 쓰지 말라는 말이다. <문심조룡>에서 깊이 다루지는 않았으나 글쓰기를 '기'와 연관시켜 이야기하는 점이 재미있다. 무엇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활동이다. 칼로리 소모로 따지면 그렇게 고된 활동은 아니다. 꼬박꼬박 끼니를 챙겨 먹고 앉아서 꾸역꾸역 글만 쓸 수 있다면 아마 체중이 점점 늘겠지. 글쓰기에 필요한 것은 기초대사량 + 손가락을 움직이는 정도의 근력 + 왕성한 두뇌활동을 위한 포도당 정도일까. 만약 거기에 그친다면 글쓰기가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글쓰기를 하면 뭔가 소진되는 것을 느끼는데, 유협의 말을 빌리면 바로 '기'를 소진했다고 하겠다.


글쓰기는 힘들다. 글을 쓰고 나면 헛헛하고, 내 안에 무엇인가 빠져나간 것을 느끼는 데 그것이 바로 '기'란다. 그렇다면 좋은 글쓰기를 위해서는 기를 잘 가꾸어야[養]한다. 잘 쓰기 위해서는 잘 먹고 잘 쉬어야 한다는 식으로 퉁치고 넘어가자.


역자는 <양기>에서 정력을 고갈시키는 병폐로 비교를 이야기한다. "만일 자신의 단점이 부끄러워 다른 사람의 장점을 흠모하면서 시를 쓸 수 없다는 데 참담함을 느끼고, 훌륭한 시인을 흠모하며 억지로 시를 쓰려고 하는 것은 마치 학의 긴 다리를 잘라 오리의 짧은 다리에 덧붙이면 오리와 학이 모두가 죽는 것과 같다." 맞는 말이다. 저마다 잘 쓸 수 있는 글이 다르다. 섬세한 글을 잘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호쾌한 글을 잘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과거 글쓰기 합평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남을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다. 말이 쉽지, 영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결코 틀린 말이 아니기는 하다. 내가 잘 쓸 수 있는 글과 잘 쓰고 싶은 글은 다른 법. 그 간격이 넓을수록 글쓰기는 불행하다. 


하여 자신에게 맞는 작가를 만나야 한다. 뒤에 다룰 이야기지만 끌어당겨 이야기하면 '박관博觀'이 중요하단다. "1000곡 이상을 연주한 다음에야 음악을 이해할 수 있고, 1000개 이상의 검을 관찰한 다음에야 비로소 보검을 식별할 수 있다.", "높은 산을 봐야 흙무더기의 작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고, 창해를 경험해야 도량이 얕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나에게 맞는 작가를 만나 그를 흠모하는 것이 제일이다. 나와 맞지 않는 이를 흠모하며 모방하는 것은 스스로를 해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뜻. 


문득 불행한 작가들이 떠오른다. 병을 안고 글을 썼던 작가들. 그들에게 글쓰기는 병과의 싸움이었지만, 또 다르게 보면 질병의 반향이었다. 병적인 글쓰기. 카프카, 프루스트,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헤밍웨이 등등. 그래서일까. 글쓰기를 잘하려면 뭐라도 아파야, 어떤 불행이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기도 했더랬다. 상처가 글이 될 수도 있고, 질병이 글이 될 수도 있다. 불안이 문장을 만들고, 불행이 작품을 낳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울기鬱氣있는 글을 좋아하는데, 비슷한 궤가 아닐까 모르겠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궁리가 필요하지만 여기서 그치기로 하자. 


<부회附會>를 우리말로 옮기면 짜임새, 균형감이라고 하겠다. "무엇을 '부회'라 하는가? 문장의 주제를 통솔하고, 수미의 단락을 연결하고, 취사를 결정하고, 장절을 조합하고, 전편을 총괄해 내용은 풍부하나 산만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체력이다. 아니, 기운이다. 어떤 이는 글쓰기에 힘이 붙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예컨대 서론이 길다는 것. 이러쿵저러쿵 예열을 하고, 이런저런 말을 붙인 뒤에야 비로소 볼만한 말이 나온다. 글쓰기 근육이 제대로 갖춰있지 못한 까닭이다. 반면 시작의 기세는 좋은데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는 이도 있다. 끝이 밋밋하고 아쉬운 글. 글쓰기의 체력이 제대로 갖춰있지 못한 까닭이다. 글 전체를 한 호흡으로 끌고 나가는 데는 꽤 많은 힘이 필요하다.


글 전체의 흐름을 만들었더라도, 글 안의 짜임새를 다시 손보는 것도 힘든 일이다. "문장을 고치는 일이 문장을 쓰는 일보다 훨씬 어렵고, 한 글자를 고치는 것이 한 절을 바꾸는 것보다 어렵다." 글을 고치는 것이 글을 쓰는 것만큼 힘들다 생각했는데 잘못 생각했구나. 유협의 말을 빌리면 문장을 고치는 것, 단어를 바꾸는 것이 새로 글을 쓰는 것보다 더 힘들단다. 그래, 글쓰기보다 퇴고가 더 귀찮고 싫어. 비단 나만의 병폐는 아닌 듯. 천년도 더 오랜 먼 옛날부터 그랬단다.


<시서時序>는 일종의 '문학사'이다. 대략적인 흐름은 뻔하다. 과거 먼 옛날, 요순시대에는 질박했으나 점점 말이 많아지고 복잡해지며 꾸밈이 많아지고 운운. 이를 따로 구체적으로 논하기에는 너무 번거롭다. 다만 문채가 시대와 함께 변한다는 말은 곱씹을 필요가 있다. "따라서 민가의 문채와 정리가 시대와 함께 전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 교화는 마치 바람처럼 위에서 움직이고 시가는 물결처럼 아래에서 출렁인다." '風動於上而波震於下'는 필시 공자의 말에서 빌려온 말일테다. 공자는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아서 바람이 부는 대로 백성들의 마음이 움직인다 하였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 시대의 조류, 특히 정치적인 변화가 큰 영향을 끼친다는 말이다.


과거 문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관료 지식인이었다. 문사文士, 글을 쓴다는 것은 행정 관리로서의 역량이었고 또한 통치계급의 문화 행위였다. 이런 까닭에 정치적인 상황과 무관한 글쓰기가 나올 수 있는 여지가 적었다. 그러나 거꾸로 글쓰기란 늘 '정政', 통치 행위와 어긋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활동이기도 하다. 지금껏 동아시아에서 글쓰기는 정치상황에서 독자적인, 독립적인 활동이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순수한 문학의 세계라는 것이 있을까. 글쓰기는 늘 사회의 반영이며, 나아가 글쓰기는 사회적인 가치로 수렴된다. 작가 개인의 독자적이고 개인적인 활동이 아니라는 뜻. 그렇다고 늘 사회에 포섭되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동아시아적 글쓰기는 사회로 회귀하는 그 현상 때문에 늘 바람을 일으키곤 했다. 누군가는 작가가 글로 딴 세상을 창조한다고 하겠지만, 거꾸로 글로 세상을 바꾼다고 하겠다. 


하여 내가 사랑하는 글은 바람 같은 글이다. 때로는 모래가 묻어오는 바람,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 나를 뒤흔들고 날려버릴 것 같은 폭풍 같은 글을 늘 갈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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