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이 찾아온 날의 회고
삶과 죽음, 그사이를 구분 짓는 경계를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찔한 사고의 순간, 기나긴 질병과의 사투, 우리의 인생은 출생에서 죽음으로 가는 수많은 선택이라는 명언이 다시금 와닿는 일주일이었다.
월요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난 탓에 하루의 시작부터 바지런을 떨었다. 버스에서 내려 회사까지 질주를 하고, 오전 내내 주요한 미팅을 위해 회의실 구조를 바꾸고, 답례품을 챙기는 소소한 일들에 정신이 쏠렸다. 그사이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 My Fafa.
딸의 출근 시간을 잘 아는 부모님은 9 to 6에 전화하는 법이 없다. 늦은 저녁이나 이른 아침 아니고서는 업무에 방해 갈까 문자도 삼가신다. 웬일이지? 잠깐 갸우뚱할 뿐 진행 중인 회의에 집중하기 위해 전화를 받지 않았다. 20-30분 찜찜한 채로 미팅을 마무리하고 잠시 자리를 피해 전화를 걸었다.
"아빠 무슨 일이에요?"
“아.. 아빠가 사고가 났는데 엄마는 이미 병원으로 가고 아빠도 지금 사고처리 마무리하고 병원으로 가려고 해. 엄마 괜찮은지 전화해 봐. 차를 폐차해야 할 거 같다.”
순간 띠용.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고의 전말은 이랬다. 일출의 눈부심에 전방의 시야 확보가 잘 안 되는 상황에서 2차선을 가다가, 정차된 차를 피해 살짝 차선을 물고 달렸는데, 맞은편 달려오던 트럭과 그대로 정면 추돌한 것이다. 상대방 운전자와 트럭은 무사했으나 아빠엄마가 탄 그랜저가 박살이 나버렸다. 차가 충격을 모두 흡수했던 건지, 에어백이 잘 터진 건지 정말 감사하게도 부모님도 외상없이 무사할 수 있었다.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아빠 걱정만 했다. 운전자 쪽으로 충격이 많아서 사고직후 아빠가 한동안 정신을 못 차렸다고. 오전 내내 병원에서 검사한 결과, 두 분 모두 큰 이상은 없었다. 그러나 2~3일 근육이 놀라고 메스꺼움과 구토 혹은 가슴이 답답한 등의 후유증이 있을 수 있다고, 이를 대비해 약을 처방해 주셨다. 아빠는 입원, 엄마는 통원하는 것으로 상황이 정리되어 갔다.
사고 소식을 접하고 나는 한동안 얼이 빠진 것처럼 정신이 아득했다. 하필 이번주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바쁘고 신경 쓸 일이 많아 조금의 여유라도 부리기 어려운 상황인데, 이를 어쩌지? 갑자기 들려온 소식에 집으로 내려가야 하냐 마냐 고민이 들면서 머릿속에서는 온갖 스케줄이 꼬여갔다. 긴장모드와 초조모드에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결국, 부모님의 컨디션이 큰 걱정 없이 회복세를 타고 있어서 주말에 내려가는 차편을 티켓팅하고 아침점심저녁으로 통화하며 상황을 체크해 나갔다. 금요일 아침, 사고 5일째가 되어서 엄마의 가슴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사고직후에는 갈비뼈에 이상이 없었는데 일상생활을 조금 일찍 시작한 터라 움직임이 영향을 미쳐 갈비뼈 2개 골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렇게 금요일 퇴원한 아빠의 바통을 이어받아 엄마가 그대로 입원절차를 밟았다.
"엄마, 그러니까 며칠은 푹 쉬어있어야 한다니까... 왜 말을 안 들어!ㅠ"
하필 토요일은 엄마 생일이다. 월초에 집에 다녀온 터라 연말엔 가기 어려울 것 같아서 꽃다발 예약을 해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사고로 꽃다발의 도착에 맞춰 아침 일찍 나와 가족도 함께 배달된 셈.
집에 도착하니, 확연히 초췌한 안색의 아빠가 우리를 맞았다. 큰 사고를 겪은 당사자로서 예전의 박력과 에너지는 사라진 모습이었다. 아빠를 모시고 엄마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환자복을 입은 채 누워있던 엄마를 보니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순간 내가 고2 때 쓰러져 중환자실에 계시던 외할머니가 오버랩되었다. 어느 순간 정부가 지정하는 만 65세 노인의 대열에 합류한 부모님을 새삼 다시 바라보고 생각해 보게 된다.
애들이랑 남편이 잠시 자리를 비운 몇 시간 동안 나는 엄마랑 병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시시콜콜 일상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일하면서 든 고민, 그간 만나온 사람들부터 경직된 워킹맘의 일상 속에 맘대로 되지 않았던 일들까지... 엄마한테 쪼르르 달려가 재잘거리는 8살의 나로 돌아간 것 같았다. 중간중간 사진첩에서 사진을 찾아 보여주며 엄마랑 떨어져 있던 내 삶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먼 길을 달려 진짜 마음이 편해지는 집에 왔구나 싶은.
크고 작은 사고를 겪게 되면 별다른 외상이 없더라도 보이지 않는 트라우마가 남는 법. 당사자가 아닌 나에게도 그런 트라우마가 남은 것 같다. 영화 <트루먼쇼>에서 마지막 장면은 강렬하다. 주인공 트루먼이 평생 진짜인 줄 알고 보낸 공간이 모두 허상이었고, (백스테이지로 연결된) 진짜 현실로 가는 문이 활짝 열렸을 때!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부모님의 사고 소식은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라이브 된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문이 순식간에 열린 것 같았다. 그 경계를 아주 선명하게 본 것처럼 마음에 깊은 충격을 남겼다.
다행히 기적은 우리 가정에 찾아와 주었다. 다시 엄마아빠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그러면서 우리 가족이 모두 안전하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날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은 인생이라는 것을 매일 기억해야겠다. 그런 기저가 마음에 깔렸을 때, 아이들과 남편에게도 더 여유를 갖고 대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다시 하루를 사랑하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