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차 기획자의 커리어 탐색기
어제 하루 내내 비가 오더니, 오늘은 파란 하늘과 우거진 녹음이 절경을 이루는 100점 만점에 200점 날씨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 나는 남편과 예술의 전당 국립국악원으로 향했다. 나에게 가야금의 매력을 알려준 어느 연주자의 독주회가 있어서다.
그녀와의 첫 만남은 청소년 대상 공연 프로젝트를 시작하려 했던 무모하기 짝이 없는 7년 차 광고 기획자 시절이었다. 주변에 아는 연주자 하나 없는 데 어떻게 무대를 세우지? 고민하던 찰나에 광고 회사 동료가 자신의 동생과 친구를 연결해 줬다.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강남대로의 꽤 널찍한 브런치 카페에서 이뤄졌다. 뭘 좋아할지 몰라 이것저것 골라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처럼 대화의 주제도 다소 초점을 잡지 못하고 헤맸다. 그러다 대화가 무르익으며 우리는 비슷한 공감대를 찾아나갔다. 청소년 시기의 깊고 길었던 방황. 그리고 시기를 옆에서 응원해 주고 기다려준다면 터널은 언젠가 끝이 나온다는 것. 그런 경험담을 서로 나누면서 나는 막연히 하고 싶었던 공연의 실체를 점점 구체화할 수 있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단 하나, 청소년의 힘듦을 토닥여주고 용기를 부어줄 음악 공연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입장에서 매년 천여 명의 청소년 자살 뉴스에 말을 잃었다. 마른 잎처럼 소리 없이 떨어지는 그 아이들을 누군가는 손잡아주고 다시 생기를 깨워줘야 하지 않을까? 초보엄마의 얕은 모성애라도 도움이 되는 일에 쏟고 싶었다. 문득 나는 고등학교 시절 처음 봤던 뮤지컬 공연을 떠올랐다. 내가 아는 세상이 모든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공연처럼, 너희의 무한한 잠재력 가득한 세상을 기대해 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연주자들의 악기 연주와 그들의 인생 스토리를 녹여 멘토링식 토크 콘서트 형식을 만들었다.
그렇게 내가 시작했던 '학교로 찾아가는 공연' 프로젝트는 1,000일 간 66회의 공연으로 수 천명의 학생들을 만나며 순항했다. 돌이켜보면 내 무모함으로 첫발을 내디뎠지만 그 모든 과정이 가능했던 건 그런 나의 도전을 받아준 그때의 시간과 환경이었다. 사회적 기업육성사업 선정을 시작으로 연이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자체의 각종 지원사업을 수주하면서 다소 추진하기 어려운 공연기획에 마중물을 부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공은 광고 기획자 출신으로 기존의 공연을 관객의 관점에서 재해석해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나를 믿고 따라준 수많은 아티스트들이다. 그들은 무대의 주인공으로 기꺼이 참여하며 초보 공연 기획자에게 노하우를 아낌없이 공유해 주었다.
갑작스러운 코로나19가 찾아오기 전까지 꿈에 그린 무대를 세워나갈 수 있었다. 그 이후에는 오프라인 무대보다는 콘텐츠 개발로 방향을 틀었다. 그동안 함께 했던 연주자들과도 자연스럽게 다음을 기약했다. 그 많은 무대 중에 나와 함께 한 무대가 단연 좋았다고 말해주는 연주자도 있었다. 항상 악기로만 소리를 내다가 '마이크'를 쥐고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연주자에게 흔히 있는 기회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지금의 나는 그간의 모든 경험이 이끌어 가는 대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나의 중구난방 커리어패스를 보며 나는 항상 이 과정이 나를 어디로 이끌어줄까? 궁금했다. 그저 마음이 내키는 대로 크고 작은 도전을 이어왔던 것인데 뭐 하나 정석의 길이나 전문가코스로 달리는 건 아니어서 어쩔 때는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런 내 고민을 듣던 한 지인은 나에게 아주 의미 있는 해석을 해주었다. 내가 해왔던 그 모든 것에 '진심'이 담긴 것 같다고. 순간 명쾌한 그 단어에 울컥 뜨거운 감동이 차올랐다. 그렇게 나는 로레인이라는 필명을 진심 어린 로레인으로 바꿨다. 그래 진심이었다. 그래서 돌아보면 후회가 없는 걸음이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간대도 난 아마 비슷한 여정을 택할 것이다. 그만큼 강한 확신에 찬 걸음이었다.
오늘 연주자의 무대를 들으면서 나는 각자의 인생 기찻길에서 우리가 잠시 겹쳐있었음에 새삼 감사함이 들었다. 내가 반했듯 앞으로도 한국을 빛낼, 더 나아가 세계에 가야금의 온기 품은 아름다움을 전할 그녀에게 무한 응원의 파이팅을 보낸다. 한때 커리어의 여정에서 서로 도왔던 그때의 참 풋풋하고 사랑스러웠던 우리의 모습은 추억 상자에 고이 담아둬야지. 그리고 우리의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