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대화할 때 필요한 규칙
남편은 가끔씩 농담으로 학창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매년 새 학기에 올라가면 키가 크고 눈에 잘 띄어서 친구들이 자기가 운동을 잘하는 줄 알고 축구, 농구 시합을 뛸 수 있게 해 줬단다. 그런데 한두 번 하고 나면 실력이 들통났다고. 그나마 좋아하고 잘하는 게 야구여서 대학까지 취미로 야구팀에서 포수를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본인이 이루지 못했던 이상적인 학창 시절을 그려보며, 아이가 하고 싶다는 운동은 무조건 배우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큰 아이는 여섯 살부터 축구, 여덟 살에는 수영, 열 살에는 농구까지 하나씩 종목을 늘리며 매주 스포츠아카데미를 순회하고 있다. 스포츠맨으로 성장하기에는 특출 난 재능은 없지만, 남편의 말마따나, 학교에서 친구들과 운동장을 누비는 것에서 자기가 맡은 역할 정도는 해낼 수 있는 아이로 성장하고 있는 듯했다. 몇 달 전 새 학년에 진입하여 학교 선생님과 처음으로 상담을 할 때, 체육시간에 아이의 인기가 가장 높다고 말씀해 주셨다. 내가 몰랐던 학교 생활 속 아이의 모습은 우리의 이상점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하루는 학교에서 알뜰시장이 열렸다. 매년 학년 별로 집에서 사용하지 않는 깨끗한 장난감과 물건을 가지고 와서 가상의 쿠폰으로 사고파는, 일종의 경제 교육 수업의 일환이다. 아이는 1, 2학년의 경험을 살려, 팔릴만한 물건을 뒤지기 시작했다. 포켓몬 카드, 장난감 총 등 친구들을 떠올리며, 그 친구들이 좋아하는 물건으로 신중하게 가방을 쌌다. 나는 미어터지는 장난감통에서 더 이상 아이들 손이 안타는 장난감 두세 개를 집어, 아이에게 들이밀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하나였다. "엄마, 그건 안 팔릴 거예요"
아이의 장사꾼 기질을 확인해 볼 수 있는 날, 설레는 마음으로 등굣길 완판을 외치며 아이와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어떤 결과를 들려줄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퇴근 후 아이를 만났다. 아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입을 뗐다. 총 5타임이 있었고 각 사이마다 쉬는 시간이 주어진다고 했다. 과열된 시장을 잠재우기 위해 세팅된 환경 같아 웃음이 났다. 그리고 뒤를 이어 아이는 "저는 첫 타임에 다 팔았어요"라는 깜짝 놀랄만한 답을 해주었다. 남은 타임은 뭘 했냐고 묻자, "선생님이 다른 것도 더 팔아달라고 하셔서 그것도 팔아드렸죠~"라며 여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반면, 벌어들인 쿠폰으로 아이는 자기의 위시리스트를 채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많은 쿠폰으로 아이가 평소 관심 있는 것들을 하나씩 사모았다. 그중 뽑기 게임처럼 차등 리워드를 주는 게임을 만들어와서 돈을 쓸어 모은 한 친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이의 쿠폰도 꽤 그 게임으로 사용된 듯했다. 그렇게 아이는 LG트윈스의 응원 수건(연식이 좀 돼 보이는), 엄마 선물로 구입한 키링 인형, 그 외 몇 개 작은 장난감을 챙겨 왔다.
응원 수건을 자신 있게 펼쳐 보이며, 아이는 이제부터 자신은 LG트윈스 팬이 될 거라고 선언했다. 재작년 처음으로 야구 경기장에 간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두산과 삼성의 경기였다. 그리고는 종종 TV에서 중계하는 것으로 기아타이거즈의 경기를 본 적이 있었다. 뜬금없는 아이의 선언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왜 갑자기? 아이는 이유 없이 이 수건이 주는 의미가 큰 것처럼 침대맡 벽에 걸어 전시하고 싶다며 서랍을 뒤져 꽂꽂이 핀을 찾기 시작했다.
퇴근 후 돌아온 아빠에게도 그 소식을 전해주자, 남편은 웃음을 찾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야구팀의 팬이 된다는 사실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 행동이 우리에게 불러올 파장은 생각지도 못한 채 말이다. 아무 말 없이 사라진 아이는 2층 침대 구석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기 시작했다. "내가 팬이 될 거라는데, 왜 비웃는 거예요!"라는 설움이 섞인 말을 내던졌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함을 느낀 나와 남편은 아이에게 미안하단 말과 함께 용서를 구했다. 이미 울음이 터진 아이는 완강히 대화를 거부했다.
띠로리...
정말 아이는 팀이 되고 싶은 순수함을 갖고 있었을 텐데, 장난으로 던진 말들이 아이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었나 보다. 단단히 토라진 아이에게 어떻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할 수 있을까?
나는 가족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의 마음을 비웃는 건 우리 가족에게 앞으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걸 강조했다. 엄마 아빠가 더 조심할 것이며, 형제끼리도 그런 놀림과 비웃음이 섞인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아침에 동생이 옷을 거꾸로 입은 것을 놀렸던 것도 안될 일이라고 말하자, 아이는 자신의 행동을 돌아봤다.)
그렇게 우리는 그라운드를 누비는 선수들처럼 그라운드룰을 작성했다.
<놀리지 않기>
상대가 진심으로 좋아하고 아끼는 것을 마음대로 비웃거나 놀리지 않는다. 말할 때 생각하고 말하기!
그리고 각자의 이름에 서명했다. 이 세리머니를 하고 나서야 큰 아이는 마음이 풀렸는지 나를 안아주었다. 삐-익! 어디선가 휘슬 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오늘도 치열한 경기 한 판이 끝났다!
남편과 결혼한 지 11년, 큰 아이와 작은 아이와 한 집에 살기 시작한 지 9년, 6년이 넘어간다. 우리에겐 매번 새로운 그라운드룰이 필요하다. 그것이 각자의 세상을 단단하게 지켜주고, 서로의 세상을 존중해 주며, 앞으로 함께 나아갈 든든한 팀워크가 되어주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