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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늘한여름밤 Apr 05. 2018

서로를 책임지겠다는 약속.

너는 나의 보호자, 나는 너의 보호자가 되어. 

 너는 힘든 일이 있었던 날이면 아이처럼 나를 폭 끌어안고 잔다. 나랑 이렇게 안고 있어야 집에 돌아온 느낌이 든다는 너. 따뜻하고 동그란 너의 머리통을 가만히 안고 쓰다듬는다. 오늘 낮에 너는 참 강한 사람이었겠지. 수많은 일들을 책임감 있게 처리하고, 너를 피곤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혼자 집까지 씩씩하게 걸어 돌아왔을 것이다. 내 팔에 감기는 이 말랑말랑한 몸을 안고 있자면 밖에서 너는 "30대 남자 직장인(대리급)"이라는 코스프레를 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너는 피곤했던지 금새 잠이 든다. 나를 감고 있던 몸에 힘이 풀리는 게 느껴진다.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의 무게가 내 팔에 실린다.  


 연애에서 동거로, 동거에서 결혼으로 넘어갈 때 사랑과 함께 무거워졌던 것이 책임감이었다. 결혼 전까지 나는 나 하나만 잘 책임지면 됐다. 사실 내 인생 하나 책임지는 것도 버거워 허덕였다. 다른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가끔 최악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 해봤다. 어느 날 갑자기 큰 사고를 당해 제대로 사지를 가누지 못하고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너. 그리고 앞으로 남은 네 인생을 경제적, 물리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걸 깨닫는 나. 쏟아지는 병원비, 끝이 없는 서류 처리, 내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너. 그 순간 우리의 결혼을 저주하지 않고 네 옆을 기꺼이 사랑으로 지킬 수 있을까? 상상 속의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내가 과연 결혼해 누군가의 보호자가 될 준비가 된 사람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인생의 재미있는 점 중 하나는 내가 확신이 있는지 준비가 되었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들이닥친다는 것이다. 함께 살기 시작하며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서로 삶의 일정 부분을 연대책임지게 되었다. 내가 화가 나서 집에 들어온 날이면 너도 함께 분노로 이를 간다. 0.7인분의 월급을 주는 너의 직장 덕분에 나는 1.3분의 돈을 벌기 위해 들어오는 일을 거절하지 못하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너의 빨래를, 너는 나의 식사를 책임지고 있다. 내게 얹혀진 남의 삶의 무게는 느껴질 때마다 생경하다.  



 내 인생이 살만한 날이면 내가 지고 있는 너의 삶의 조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 한다는 뿌듯함이 나를 더 열심히 움직이게 한다. 빨래도 개고 내친 김에 청소기도 돌리고, 새로 시작한 외주 정산 받으면 그 돈으로 함께 여행가야지 싶다. 그러나 내 인생 하나만의 무게도 버거워지는 날이면 모든 게 짜증이 난다. 왜 너의 빨래가 이렇게 많은지, 왜 너는 평균보다 돈은 못 벌면서 평균만큼의 스트레스를 받아서 오는 것이지, 나는 이렇게 힘들게 내 몫의 책임을 다하려고 하는데 왜 너는 내가 먹을 점심을 준비하지 않고 나간 것인지. 너로 인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 있다는 게 참을 수 없이 부당하게 느껴진다. 무임승차한 팀원과 함께 팀플을 해내야 하는 팀장이 된 기분이다. 이렇게 네 무게가 거추장스럽다고 신경이 곤두선 날이 있는가 하면, 우습게도 또 한편으로는 너의 무게를 덜어줄 수 없어 좌절스러운 날도 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오롯이 네가 감당해야 할 압박감과, 너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과,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고통들로 네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무력함을 느낀다. 네 마음의 고통 중 단 한 조각도 나눠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 나는 아주 슬퍼진다. 할 수만 있다면 네 앞에 놓인 문제들을 내 팔 한 가득 안아 덜어주고 싶다. 물론 나는 그런 다음 무겁다고 이게 다 뭐냐고 짜증 내겠지만.   


 우리는 서로를 책임지겠다고 약속한 사이이다. 사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약속을 했다.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약속했다. 그리고 지금은 하다 보니, 하게 되었다. 다 큰 성인이지만 우리는 서로의 보호가 필요하다. 도저히 못 견딜 회사를 그만 둘 때 생활비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고, 새벽에 택시를 불러 응급실에 함께 가줄 사람이 필요하고, 유난히 힘든 날 꼭 끌어안고 잠들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보호자로 성장하고 있다. 내가 아닌 타인의 삶을 끌어안을 수 있는 여분의 마음과 능력을 기르려고 노력한다. 상대가 보드랍고 섬세한 아이 같은 마음으로 살 수 있도록 듬직하고 단단한 어른이 되려 한다. 그래서 이 집에는 두 명의 어른과 두 명의 아이가 살고 있다.  


오늘 그 중 한 아이가 내 품에서 잠들었다. 

네가 깨지 않게 조심해서 내 팔을 빼고 네 보들보들손을 한 번 꼭 잡아본다. 

잘 자 나의 사랑. 

내일도 우리 서로를 지켜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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