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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늘한여름밤 May 03. 2018

결혼이라는 기득권

동거는 많은 면에서 결혼과 비슷했고, 많은 면에서 결혼과 달랐다

"결혼한지 얼마나 됐어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잠시 망설이게 된다. 우리는 함께 살기 시작한지 3년 반이 넘었고 ‘결혼’을 한 건 1년 반 됐다. 내게는 너와 함께 살기 시작한 게 내 인생에서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고, 결혼은 그냥 우리가 함께 살던 중간에 있었던 한 사건일 뿐이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와 우리는 떠났을 때와 같은 집에 돌아왔다. 같은 방에 이불을 고 잠들었고, 같은 식탁에서 저녁을 차려 먹었다. 우리의 일상은 결혼식 전과 조금도 달리진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흰색 웨딩드레스를 입고 너와 함께 버진로드를 걸었던 그 날 이후 우리의 삶을 둘러싼 공기는 달라지고 있었다.    


결혼 전 어디서 누구와 함께 사냐는 캐쥬얼한 질문에 남자친구와 함께 산다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반응”했다. 좋겠다, 내 친구 중에도 결혼 전에 그렇게 산 친구가 있어요, 흐으응?, 요새는 결혼 전에 많이 그렇게들 하더라고요, 그래요?, 네?, (정적), 남자친구랑 함께 산다고요? 허허허.. 등등등. 다행히 면전에 대놓고 무례한 반응을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누구 하나 “그렇군요”하고 무심히 지나치지 않았다. 너와 동거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누구한테까지 얘기해야 하는지는 고민이었다. 할머니에게는 말하지 않았고, 이모에게는 말했다. 고모는 모르고 있고, 사촌들은 알고 있었다. 결국 누가 알고 있고, 누구에게 말했는지 뒤죽박죽이 되어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 되었지만.     


나는 너와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살다 보니 충분하지 않았다. 우리는 조금 더 넓은 집이 필요했고, 이율이 조금이라도 낮은 신혼부부 전세자금 대출을 받고 싶었고, 서로의 보험 수령자가 되고 싶었고, 응급 상황에서 법적 보호자가 되고 싶었다. 가족 행사에 너를 편안하게 데려가고 싶었고, 결혼하고 어른 대접을 받고 싶었다. 누구든 내가 너와 함께 사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길 바랐다. 나는 결혼이 필요했다. 못할 게 무엇인가? 양가 부모님은 이왕 같이 살게 된 거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면 좋겠다는 눈치였다. 그 당시 둘 다 (이름은) 번듯한 직업이 있어 “그 집 며느리/사위는 뭐 하는 사람이에요?”라는 질문도 두렵지 않았다. 우리는 결혼이라는 기득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혼식 날 우리는 많은 이들의 축복을 듬뿍 듬뿍 받았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해 직장을 다니는 결혼적령기의, 양친이 건강하시고, 직계가족 모두 비장애인인, 초혼인 남녀 결혼식에 초대된 사람들은 어떤 불편함도 없이 축하를 하고 웃고 축의금을 냈다. 그 날 우리의 관계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앞으로는 누구에게든 우리가 함께 살며 심지어 매일 밤 함께 자는 사이! 라고 이야기 해도 괜찮을 것이었다. 부모님은 결혼자금이라는 명목으로 나름의 거액을 건내주었다. 회사에는 공식적으로 5일간의 휴가를 줬다. 신혼여행 비용은 축의금의 일부로 충당할 수 있었다. 세부 고급 리조트 테라스에 누워 저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결혼과 함께 찾아온 예상치 못한 기득권의 맛은 짜릿했다.  


결혼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동참하게 된 것은 낯설지만 편안함을 주었다. 우리는 “신혼부부”라는 예쁜 이름으로 불렸고, 어쩌다 야근이 있는 날이면 동료들은 “결혼했으니까 일찍 들어가봐야지~ 신혼인데~”라며 웃었다. 이미 우리는 2년을 같이 살았는데, 새삼스럽게도.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두 번째 퇴사를 했는데 놀랍게도 똑같은 백수인데도 남자친구와 동거하는 백수와 결혼한 백수는 느낌이 달랐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백수이든 아니든, 사회적 규범에서 얼마나 이탈하든, 결혼 상태인 이상 기혼자라는 “정상성”은 나를 따라다니며 지켜줄 것이었다.  


나는 이 기득권을 획득하기 위해 특별히 노력한 것이 없었다. 어쩌다 이성애자로 태어났고, 결혼을하고 싶었으며 소위 말하는 결혼적령기에 결혼할만한 인연을 만났고, 전세집을 얻을만한 돈을 구할 수 있었다. 구청에는 우리의 결혼을 법률적으로 보장해주기 위한 서류를 한 켠에 준비해놓고 있었고, 그 한 페이지를 작성하고 제출하는 것으로 우리는 공식적인 가족이 될 수 있었다. 결혼하지 않는 혹은 결혼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을 차별하며 공고히 지켜져 온 기혼이라는 권력이 그렇게 내 삶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이 편안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나는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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