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함께 수다 떨 수 있게 된 이 저녁이 좋다
요새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밑도 끝도 없는 수다를 떠는 저녁이다. 저녁을 먹고 그릇을 간단하게 치우고 소파에 각자 아무렇게나 자리 잡는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사소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수다는 꼬리를 문다. 오늘 화분에 물을 줬는지, 고무나무는 얼마나 자랐는지, 내일 저녁은 뭘 먹어야 하는지, 어릴 때 편식하는 음식은 없었는지, 너희 어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헌신적이신지, 너랑 어머니랑 어떤 점이 똑 닮았는지….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거실을 채우며 우리가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하루 종일 떨어져 있었던 너와 나를 스멀스멀 다시 이어준다. 나는 앉아서 얘기하다가 너의 무릎을 베고 이야기하다가, 설거지 하는 네 옆에서 알짱거리며 이야기 하다가, 로션을 발라주며 이야기 하다가, 침대에 누워서 이야기 하다가 잠이 든다.
우리의 수다는 데이트 나가 근사한 카페에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것”과는 다르다. 나는 이상하게 너랑 각 잡고 대화를 하려고 하면 엉덩이가 들썩인다. 매일 보는 사이에 새삼스레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생각이 나지 않고, 앉아있는 의자도 불편한 거 같고, 상대의 눈이 아니라 핸드폰을 보고 싶어지고, 그런데 그러면 안될 거 같고, 이 와중에 의미 있는 대화를 하고 싶은데, 잘 안되니까 속상해진다. 저녁의 수다는 이런 부담을 모두 걷어내고 호로록 타 마시는 믹스커피 같다. 앉아 이야기 하는 게 불편하면 누워버린다. 핸드폰을 보며 건성건성 이야기 하다가 재미있는 걸 발견하면 서로 보여주고 웃는다.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즐겁다. 저녁을 먹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슬며시 소파로 모이는 걸 보면 우리는 그 시간을 즐기고 있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친해졌나 싶다. 너랑 대화하는 게 너무 재미없다고 짜증을 부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나는 연인과 서로의 느낌이나 생각, 좋아하는 것을 나누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무에게도 보일 수 없었던 내밀하고 섬세한 마음을 활짝 펼쳐 포개보는 것이 나에게는 사랑이다. 그러나 너는…너는 펼쳐 보일 것이 없다고 했다. 별 감정이나 생각이 들지 않고,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없다며 곤란해 하는 너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대신 너는 자꾸 네가 본 것, 네가 알게 된 사실들, 네가 하고 있는 일을 설명하려고 했다. 지겨웠다. 구구절절한 설명을 듣고 있자면 ‘내가 왜 지금 이런 얘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거지?’ 싶었다. 예를 들어 너는 “00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어.”라고 사실만을 툭 던져줄 때가 많았다. 나는 그래서 네가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설렌다는 건지, 그 프로젝트가 너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었다. 너는 그 프로젝트가 얼마나 큰 규모인지, 얼마나 돈이 많이 들어가는지, 그 프로젝트의 주체가 누구인지 나열했다. 너의 이야기에는 네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리 들어도 너를 만날 수 없었다. 나는 너를 사랑했지만 너와 친해지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온갖 방법을 시도해봤다. 내가 시도했던 방법들 중 기억나는 걸 정리해보자면 .. 1) 세 가지 키워드로 말하기: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전 먼저 그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세 가지 키워드를 말해본다. 키워드를 선정하면서 두서 없는 이야기가 머리 속에서 한 번 정리되고, 듣는 사람도 무슨 이야기인지 더 호기심이 생긴다. 2) “그래서 나는 어땠어”: 네가 사실만을 묘사하고 대화를 끝내려고 하면 “그래서 너는 어떤 감정이었어?”를 물어본다. 그러다 보면 일의 객관적 규모나 중요도가 아니라 주관적으로 본인에게 중요했던 일을 구분하게 된다. 처음부터 감정을 이야기 하는 건 어려워하므로 “그래서 싫었어? 좋았어?”처럼 간단한 질문으로 시작하고 점점 더 세분화된 감정의 목록(예: 실망스러웠어? 긴장됐어? 부담스러웠어?)을 제시해 선택하게 한다. 3) 세 가지 단어로 짧은 이야기 만들기: 상대가 무작위로 선택한 세 단어가 포함되는 짧은 이야기를 만드는 놀이. 주로 자기 전에 많이 했었다. 지어내는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주제나 정서가 있다는 걸 발견하게 돼 재미있었다. 4) 집단상담: 나의 추천으로 너는 지금 집단상담에 다니고 있다. 집단상담은 집단원들과의 다양한 관계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발견하는데 도움을 준다. 나는 너를 알아가고 싶었다. 그러려면 네가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어야 했다.
나의 집념 어린 노력들로 너는 점점 더 대화하기 즐거운 상대로 성장하고 있다. 조금씩 네가 느끼는 마음들을 털어놓는다. 일이 많아 너를 짓누를 때의 부담스러움, 나 없이 혼자 집에 있을 때의 무료함, 나와 함께 놀 때의 즐거움, 거래처 사람의 무례함에 대한 경멸, 내가 너한테 쌀쌀맞게 굴 때 느껴지는 서운함. “나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 해도 돼?”라고 허락을 구하고는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신나서 와다다 쏟아낸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의 가지에 작고 투박한 너의 마음이 조르르 달려있는 걸 보면 웃음이 나온다. 함께 살던 반려동물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 이런 기분일까? 지금까지 나의 시선으로만 구성되었던 우리 관계에 새로운 이야기가 풀쩍 끼어든다. 너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게 이렇게 재미있을 수 없다.
우리는 아무 이야기나 서로에게 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낯뜨거운 욕심이나 남들이 들었다면 재수 없다고 혀를 찼을 생각, 별로 재미없지만 꼭 하고 싶은 농담 같은 것들을 얼마든지 들어준다. 네가 소철 화분에 물을 많이 줘 죽인 것에 대해 두고 두고 죄책감을 느낀다는 건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지만, 나는 알고 싶다. 내가 어제 저녁 고양이 키우는 꿈을 꿨다는 건 누구도 알 필요 없지만 그게 어떤 고양이였는지 너에게는 말해줄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아니었다면 무심히 흘려 보냈을 삶의 사소한 조각들을 발견하고 있다.
오늘 저녁에는 퇴근해 돌아온 너에게 이 글을 읽어줄 것이다. 우리는 또 이걸로 한참 뒹굴 거리며 수다를 떨겠지.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를 둥글둥글 감싸 안겠지. 서로를 보게 될 거야. 그러면 우리는 별 거 아닌 말에도 웃음이 터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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