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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늘한여름밤 Oct 25. 2018

나의 고통이 너의 고통이 될 수 없다면

함께 세상과 맞서줘

 

오랜만에 티비를 틀었던 게 화근이었다. ‘인생단어’를 주제로 청춘과 인생, 도전과 꿈을 다룬 평범한 다큐가 방영되고 있었다. 한 남대생이 진로에 대한 고민을 토로했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봤다. 다음 장면에는 어떤 남교수가 나와서 인터뷰를 했다. 꿈을 찾아 무모한 도전을 하는 서른 살 청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남자였다. 그 다음 장면에는 어떤 사장님이 자신이 어떻게 역경을 극복했는지 이야기했다. 역시 남자였다. 이 즈음 되면 제목이 ‘인생단어’가 아니라 ‘남(男)생단어’라고 했어야 하지 않나 싶다. 도대체 여자는 언제 나오나 싶어 오기가 나서 끝까지 봤는데, 끝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남자들만 인터뷰이로 나오는 게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할 수가 있지? 열불이 치솟았다.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의 인터뷰이가 여성이었다면 제목을 ‘인생단어’라고 했을까? 아마 ‘여성의 인생’이라고 한정하지 않았을까? 왜 인간의 디폴트 값이 남성이라고 생각하는 후진적인 시선을 2018년 공중파에서 봐야 하는 걸까? 한참이나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트위터에 와다다 쏟아내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내 옆에서 함께 티비를 보던 너는 어느새 침실에 들어가고 없었다. 나는 새벽이 되도록 분이 가라앉지 않아 씩씩거리고 있는데, 너는 옆에서 새근새근 잘도 잔다. 우리의 온도 차이에 마음이 서늘해진다. 



 부끄러운 고백하자면 나는 대학원을 다닐 때만 해도 우리 사회의 남녀평등이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경험할 일은 매우 드물 거라 믿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여초 학과에서 대부분의 교수진들이 남자였던 수업을 들으면서도 성차별이 나의 일은 아닐 거라 믿었다. 노력만 하면 분명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여자라서 내가 차별 받을 일은 없으리라 믿고 또 믿었다. 그래서 내가 겪는 일들은 여자라서 겪는 게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 생각했다. 매우 무례한 택시기사나 길가에서 아무렇게나 어깨를 치고 가는 사람들, 택배를 받을 때 혹시 몰라 휴대전화로 112를 누르고 문을 열어주는 일들, 임신과 결혼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들. 대기업의 유리천장은 마치 중력이나 노화처럼 피할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대기업에서 내 미래를 펼칠 꿈은 애저녁에 접고, 선진국에서 일을 하거나 여초 분야에서 전문가를 하겠다고 꿈을 굳혔다. 그런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네가 나와 길을 가다 문득 얘기했다. “그거 알아? 사람들이 네 어깨 되게 많이 치고 간다.” 그래서 나는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어깨를 많이 치고 가지 않는 세상이 네 어깨 너머에는 존재한다는 것을.


 연애를 하면 상대가 속한 세계를 만나게 된다. 내가 너를 통해 건축, 홍성, 야구의 세상을 만나고 네가 나를 통해 심리학, 사업, 창작의 세계를 만나 듯. 나는 너를 통해 ‘남자의 세상’을 처음으로 만났다. 너는 내가 가까운 거리에 택시를 이용하지 않는 이유를 내가 말해주기 전까지 몰랐다. 너는 아무렇지 않게 대기업에 입사지원을 했고, 늘 최종면접까지 갔다. 그 자리에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는 걸 내가 물어보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했다. 너와 함께 길을 걸으면 사람들과 덜 부딪쳤다. 너와 함께 있으면 예의 바른 사람들을 만날 확률이 증가했다. 부동산 사장님도, 집주인도, 이웃집 할아버지도, 택시 기사도. 나는 너를 통해 내가 일상적으로 만나왔던 것이 당연함이 아니라 무례함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갑자기 성폭행을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콘돔을 쓰지 않겠다고 어깃장을 놓는 애인 때문에 속 끓이는 친구도 가져본 적 없었다. 너의 여자인 동기들이 자꾸 외국으로, 외국으로 떠나갈 때 너는 건축가 세계가 남초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나도 네 여자인 동기들처럼 차별을 피하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나고 싶었는데, 네 삶 속에서는 차별이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나는 너를 통해 내가 경험했던 것들이 ‘인간의 경험’이 아닌 ‘여성의 경험’이라는 걸 배우게 되었다.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 했을 때 나는 공포와 분노에 질려있었다. 거짓말처럼 그 사건이 있기 일주일 전, 출근길 밝은 대로에서 어떤 이상한 남자가 갑자기 나를 공격해 경찰서에 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휘두르는 주먹에 얼굴을 맞아 윗입술에 피가 난 채로 남자를 붙들고 늘어지며 주변 행인들에게 “도와달라” “경찰에 신고해달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일주일 뒤 내 또래의 여자가 죽었다. 나를 때린 남자가 휘두른 것이 주먹이 아니라 칼이었다면 내가 그 여자가 될 수도 있었다. 정말로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공포가 피부에 감기는 더러운 느낌. 그 감각을 애써 분노로 털어내고 싶었다. 감정적으로 흥분한 나를 차분하게 달래며 너는 말했다. “걱정마. 내가 지켜줄게.” 


 아직도 그 날을 생각하면 뒷목이 뻣뻣해진다. 너에게 미친 듯이 소리질렀던 게 기억난다. “지켜줘? 어떻게 지켜줄 건데? 매일 출근길, 퇴근길, 공중화장실에 따라올 거야? 그럴 수 있어? 네가 진짜 지켜줄 수 있는 게 있어? 남자친구 없는 내 동생은 어떻게 지켜줄 거고, 내 친구들은 어떻게 지켜줄 건데?” 네가 속한 세계의 그 안온함을 나의 괴성으로 잠시나마 부숴버리고 싶었다. 단지 네 대답의 무심함에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너는 그렇게 대답할 수 있는 삶을 살았다는 게 화가 났다. 너는 번화가 화장실에서 괴한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 될 수 있으리라 상상할 필요 없는 삶을 살았다. 타인에게 일어난 폭력이 왜 내 삶에도 위협이 되는지 이해할 필요 없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세상의 절반이 너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몰라도 되는 삶을 살았다. 너에게는 이 일이 남의 일이었다. 나는 그 지점이 참을 수 없었다.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말하는 너를 내가 속한 불구덩이 속으로 쳐넣고 싶었다. 


 내가 의자 모서리에 발가락만 찧어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오는 너. 그런 네가 여성으로서 내가 받는 고통에 무심한 것을 견딜 수가 없다. 사실 너는 무심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모서리에 발가락을 한 번도 찧어본 적 없는 아기는 엄마가 방을 걷다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발을 움켜쥐는 걸 이해할 수 없다. 너는 티비 다큐에 남자 인터뷰이만 나오는 게 부당하다고 머리로는 인지하지만, 그로 인해 상처 받지는 않는다. 내가 받는 상처는 어디서부터 얘기하면 좋을까? 어릴 때 본 만화영화에서 모험을 떠나는 주인공들은 왜 다 남자였는지, 그게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지부터 이야기 해야 할까?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믿었을 중학생 때, 나는 내가 여자라서 무엇이 될 수 없을지 계산해야 했던 시간들이 지금 내 안에 어떻게 남아있는지. 어떻게 서러운 마음 없이 이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꿈을 찾아 모험하는 젊은 여성, 성공해서 멘토가 된 중년 여성, 전문가로 인터뷰하는 노년의 여성을 보지 못하고 자랐던 내 삶의 결핍이 너무 분노스럽다고 이야기 한다면 너는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지금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내 속에 용암처럼 흐르는 이 뜨거움을 어떻게 해야 네가 만져볼 수 있을까?    



 아기처럼 자고 있는 네 얼굴을 본다. 너는 정의롭고 인권의식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사회에 만연한 여혐 이야기를 할 때 너는 나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내 이야기에 모두 동의한다. 우리는 집회에 함께 나가고 가부장제에 동의하지 않는 결혼생활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자고 있는 너의 얼굴은 평온하다. 너는 내일 여자직원이 한 명도 없는 사무실로 출근할 것이다. 서류상으로 가장 뛰어났던 1등, 2등 여자지원자를 제치고 ‘같이 일하기는 남자가 좋지’라는 사장의 말로 뽑힌 남자 후임에게 일을 가르쳐 줄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맞은 편 남자가 어깨를 팍 치고 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가로등이 어두운 골목에서도 이어폰을 빼지 않고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지금, 너는 세상 모르고 잘 수 있다. 소리쳐 너를 깨우고 싶다는 충동으로 가슴이 뻐근해진다. 


 네가 나만큼 화가 날 수 없고, 나만큼 상처 받을 수는 없다는 건 안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네가 평온하게 잠든 밤 혼자 분노 속에 남겨지면 나는 참을 수 없이 외로워진다. 네가 이 고통 속에 나만 두고 떠난 거 같다. ‘겨우 티비 프로그램 하나 때문에 그러는 거야?’라는 반응일까 두려워 깨우지도 못하는 이 상황이 싫다. 나만큼 화가 나지 않더라도, 내가 화날 때 너도 내 곁에서 같은 방향으로 소리 질러줬으면 좋겠다. 네 세상에서는 아주 작은 점처럼 보여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이 내 세상 속에서는 깊게 박힌 못의 표면일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둘러싼 공기 속에 차별과 폭력이 섞여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얼마나 두렵고 힘든 일인지 네가 이해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때로 도저히 견디지 못해 울음이 터지는 날, 너는 같이 울지 못하더라도 내가 겪는 것 중 아무 것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내 옆에 있는 너의 존재를 느끼고 싶다. 


 세상이 나를 무엇이라 보든, 예민한 여자든, 용감한 페미니스트든, 명절을 거부하는 되바라진 년이든, 결혼한 가부장제의 부역자든, 너는 나와 함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을 같이 경험해야 한다. 우리의 사랑 속에는 그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 강 건너 불이 나고 있다면 네가 서있어야 할 곳은 내가 서있는 불타는 쪽이다. 나는 네가 세상 속에서 나를 지켜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 뜨거운 용암에 함께 발을 담그고 나와 같은 고통으로 눈물 흘리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면 나와 함께 세상과 맞서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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