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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늘한여름밤 Dec 06. 2017

내가 태어난 날의 일기

쩌렁쩌렁한 울음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이불을 부여잡고 침대를 쾅쾅 치며 울었다.


방금 전 일어난 일은 정말 아무 일도 아닌 일이었다. 섹스 후 침대에 함께 누워있다 네가 돌아누웠다. 그 뿐이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 섹스가 끝나고 나를 다정히 안아주는 걸 잊어버린 것도 아니었고, 누워서 노닥거리다 노곤해져서 돌아누워 잠시 눈을 붙이려는거 뿐이었다. 정말 아무럴 것도 없는 평범한 일이었다. 내가 기분이 나빴다는 것만 빼면. 하지만 나도 조금 피곤한 참이었으니 같이 낮잠을 자면 되는 일이었다. 아니, 정 잠이 안오고 심심하면자지 말라고 깨우면 됐다. 그러나 나는 상식적이고 배려심이 있는 성숙한 어른이었기에 깨우고 싶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일로 기분이 나쁘거나, 잠들려는 사람을 깨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상하잖아? 섹스 끝나고 피곤해서 잠들려는 사람 아무 이유 없이 깨우는 건. 왜 깨웠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 


나는 상식적인 선에서 행동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금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보다,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상대의 입장을 헤아려 행동하는 것이 상식적인 것이다, 헤어지고 나면 다시 연락하지 않는 것이 상식적인 것이다, 내 감정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지는 것이 상식적인 것이고, 나이가 들었으니 나이답게 행동하는 게 상식적인 것이다,  작은 일로 크게 상처 받는 것은 비상식적인 것이다, 섹스 후 잠깐 돌아누웠다고 갑자기 우는 것은 매우 비상식적인 일이다. 


서러운 감정을 느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니 나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아야 했고, 설혹 느꼈다하더라도 표현하지 않고 곰곰히 묵혀두었다가 스스로의 감정이 다 소화가 되었을 때 "사실은 내가 그때 그렇게 느꼈다"며 조곤조곤 나의 감정과 생각을 설명해주는 게 어른스럽고상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나는 엉엉 울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돌아눕지마!!! 돌아눕지 말라고!!!!"


싫다. 네가돌아누워서 눈을 감고 잠들면 싫다. 울면서 화내고 싶다. 조금 전까지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안고 있다가 네가 낯선 표정으로 잠들어버리면 나는 갑자기 홀로 남겨진 느낌이 들어 야속하고 화가 난다. 네가 졸립든 말든 깨어서 나랑 눈 맞추고 말하는 게 좋다. 네 마음보다 내 마음을 더 우선시하고 싶다. 사실은 예전부터 그러고 싶었다.  헤어지면 구질구질하게 메달리고 싶었다. 새벽 두 시에 문자 보내 깨우고 싶었다. 작은 일들로 상처를 받아 울고 싶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대답 못할 감정들을 느꼈다. 이건 내 감정이었고 내 문제였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상식이라는 건 누가 정한건거야 정말로 진짜. 어른스럽게, 빌어먹을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데 진절머리가 났다.

 

너는 서럽게 우는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너는 겁먹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상한 사람을 잘못 만났구나, 이제라도 알아 다행이다 하고 떠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늘 100% 솔직한 나를 들킬까 두려웠다. 나의 감정은 거칠었고 통제하기 어려웠다. 그 맹수 같은 것은 늘 나를 추하게 만들었다. 비이성적이고 부끄러운 말들을 하고 꽥꽥 소리를 지르고 사람들을 멀어지게 만들었다. 자기밖에 모르고 사랑할 줄도 모르면서 사랑 받고만 싶어하는 모습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나부터 너무 싫은데. 나는 솔직하기보다 사랑받는 게 더 중요했다. 그러나 돌아눕지 말라고 소리를 지른 순간부터 이미 수습할 수 없었다. 이제 글러먹은 것이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다.

나는 와작와작 깨지고 있었다.

우리는 내가 무너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함께 지켜봤다.


깨진 마음을 벗어던진 나는 알몸으로 세상에 서있었다. 그 앞에 네가 있었다. 놀라고 당황스럽고 미안한 얼굴로 나를 안으며, 어디도 가지 않고 있었다. 도망치지 않는 너를 보며 나는 알았다. 이 관계에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걸. 어떤 표정을 지어도 상관 없다는 걸.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로 소리를 지르며 울어버려도 안아줄 사람이 있는 삶이 시작되었다는 걸. 그래서 나는 깨진 마음과, 상식적인 기준들과, 어른스러우려 애써노력했던 시간들을 다시 걸쳐입지 않고 방을 나왔다.  



아마 나는 그 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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