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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늘한여름밤 Nov 28. 2017

나는 너와 사랑에 빠진 적이 없다

첫눈에 반한 적 없던 사랑에 대하여 

나는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는다.

그러나 첫눈에 반하지 않는 사랑도 믿는다.


너와 처음 사귀기 시작하고 주변에서 너의 어떤 점에 반했냐고 물어보는 질문에 대답하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와 처음 사귀기 시작했을 때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냥 만났다. 나는 외롭고 사랑 받고 싶었고 너는 나를 많이 좋아했다. 

연애를 시작할 때 꼭 운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물론 네가 그냥 나를 좋아했다면 굳이 사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너는 나를 정말 정말 많이 좋아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눈에 보이도록 좋아했다. 그런 경험은 흔치 않은 것이었다. 너를 만나며 처음으로 알았다. 좋아하는 마음은 마음 속에만 있어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표정으로 목소리로 행동으로 숨길 수 없이 뿜어져 나온다는 걸. 너의 숨 소리만 들어도 네가 나를 좋아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너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너를 사랑할 수 있다면 내 삶은 달라질 거 같았다.


 

내가 지금까지 첫눈에 반했던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자주 외로웠고 쉽게 불안했고 습관처럼 그런 모습을 숨기며 살았다. 내가 그렇게 취약하고 타인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인 게 부끄러웠다. 이런 질척이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사람들이 나를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나 같이 외로운 사람들을 찾았다. 너무 외로워서 외로움을 숨기는 사람들에게 나는 첫눈에 반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같은 부류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우리의 외로움이 서로의 외로움을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상하지만, 첫눈에 끌리는 사람과 연애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나의 마음은 글러먹었으니 머리에 의지해 상대를 골라야 했다. 그게 너였다. 마음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너와의 연애를시작한 것은 나는 이제 행복해지겠다!!는 의지의 천명이었다.

 

손끝이 닿을 때의 두근거림도, 돌아서면 또 보고 싶은 절절함도 없었다.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했다가 터질 거 같았다가 끝없이 비참해졌다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거 같은 롤러코스터도 타지 않았다. 나는 너와 사랑에 풍덩 빠지지 않았다. 너의 마음은 이미 저 멀리 가있었지만 내가 같은 속도가 아닌 것을 채근하지는 않았다. 나는 아직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말해도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너는 저만치 멀리 있으면서 네가 간 길을 내가 따라갈 수 있도록 그 길 어귀마다 사랑을 놓아두었다. 혹여 내 걸음이 힘들까 돌을 고르고 비질을 해주었다. 그래서 지금 내 마음이 어디 있는지는 몰랐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 지는 알 수 있었다.


 

이 사랑이 어느 순간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느 날 너의 옆에서 온 방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서럽게 울었던 날이었는지, 아니면 당근과 오이를 너무나 잘게 썰어 넣은 네가 싸준 유부초밥을 꼭꼭 씹어 먹은 날이었는지 모르겠다. 어느덧 사랑은 내 곁에 있었다. 마치 예전부터 그곳이 자기 자리였다는 듯.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반짝임을 기억할 수 없다는 건 아쉽다. "아 그때 우리 진짜 미친 듯이 사랑했었잖아"라고 시작하는 우리 둘만 아는 바보 같은 이야기들이 없는 건 두고두고 아쉬울 것이다. 이 사랑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인지 모른다. 어쩌면 오늘이 시작은 아닐까? 첫눈에 반하지 않았지만 너에게 새삼스레 반하는 순간이 내일 찾아올 수도 있다. 


나는 너와 사랑에 빠진 적이 없다. 

대신 한 걸음 한 걸음 자박자박 걸어 들어가고 있다. 

어디가 제일 깊은 지점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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