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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의수박 Aug 21. 2023

집 찾아 삼만리

3일째 되던 날, 이곳에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른 살에 타지에서 제주를 선택해 내려왔을 때도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한 지역에서 평생을 살아간다는 답답증이 있었고, 그럼 1~2년이라도 좋아하던 곳에서 한 번 살아볼까? 그렇게 아주 가볍게 발 한 번 담가본 것이 제주에서 무려 9년 가까이 살았다. 나고 자란 지역에서 직장생활을 한 시간보다, 타지에서의 경험들이 곱절로 많아졌고, 더 풍성해졌다. 삼십대를 제주에서 보낼 수 있었던 건 인생에 좋은 도전이었다.


제주에서도 몇 번의 이직을 했다. 좋아하는 친구들이 다시 육지로 떠나가며 나는 그들을 배웅하는 처지가 됐다. 그날그날의 날씨에 큰 영향을 받는 섬생활이 한 번씩 지겨워졌고, 마지막즈음엔 '이정도 했으면 됐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살만큼 살았다는 생각이 들자, 되레 가벼워졌다.


사실 일을 그만둘 때마다 다시 돌아가는 꿈을 꿨다. 늘 한쪽발만 담근다는 느낌으로,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마음 한켠이 있었기에 그리 오래 살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다시 돌아간다고? 어디로?'. 나에게 돌아간다는 곳이 과연 어디일까? 의뭉스러운 마음도 올라왔다.


돌아가고 싶은 곳이 어디라는 거지?

본가가 있는 고향으로? 아니면 제주 아닌 육지로 돌아가고 싶다는 건가? 막연하게 피어오른 귀소본능을 더 이상 모른 척하기 어려웠다.


한창 프로젝트로 바쁘던 2022년 여름께, 확고한 마음이 들었다. 올해 까지는구나. 지역과 겹겹이 밀착해 일을 해왔기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곳에 나를 던져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고, 이건 또 다른 기회라는 생각도 했다. 서른의 내가 용감하게 제주를 내려와 삶을 일구었던 것처럼, 마흔을 코앞에 앞둔 이 시기가  인생에서 또 다른 변곡점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제주살이를 접는다고 하자, 사람들은 다음 행선지를 궁금해했지만 나는 어떤 답도 해줄 수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살던 집에서 짐을 정리했다. 9년간의 세간살이는 실로 놀라웠고, 섬에서 육지로 짐을 빼는 비용이 그렇게 비싼 줄도 몰랐다. 이고 지고 가느니 처분하고 새로이 사는 게 더 이득이었다.


일단, 짐을 뺐다.


그해 12월은 정말 바빴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고 했던가. 일본의 유명한 정리전문가가 했던 말처럼, 어느 것 하나 사연 없는 물건이 없었고 과감히 버리는데도 많은 에너지가 들었다. 더 힘들었던 건, 그때 나는 연초 여행을 계획 중이었다. 1월에 당장, 나를 모르는 세계로 나를 던져놓고 싶은데 아직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못 정한 상태였다. 막연히 좋아하던 치앙마이와 유럽 정도만 생각했을 정도니, 주변 사람들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갈 수 있겠니? 여행지든 새로운 집이든'


어떻게든 되겠지 뭐. 이럴 때 솟구치는 나의 긍정 심이라니.  누가 보면 속 터질 일이지만 나는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정말 그랬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당시 내 마음은 여러 갈래의 물길을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꽉꽉 찬 상태였다. 워커홀릭의 번아웃은 일상을 몹시 지치게 했으니, 당장 지금 나에게 시급한 건 '낯선 세계에 나를 던지는 일'이었고, 이사는 그다음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됐다.


누가 문화기획자 아니랄까 봐, 나는 내 여정에 이름을 붙였다.


훌훌 털고 떠나는 여행엔 '텅 빈 곳간을 채우는 영감여행'이 됐고,  여행에서 돌아와 내가 살 곳은 어디?를 찾는 건 '집 찾아 삼만리' 프로젝트로 명명했다.


그렇다. 기획에서 이름이 얼마나 중요하던가! 3개월 영감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그새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봄, 집 찾기 좋은 계절이네.


집 찾아 삼만리, 본격 집 찾기 돌입


나의 <집 찾아 삼만리> 프로젝트가 본격 시작됐다. 일단 호감 가는 지역과 살아보고 싶은 지역을 1차적으로 추려봤다. 너무 번잡한 곳에서는 숨이 막힐 것 같단 생각에 애당초 서울은 후보군에도 들지 못했다. 나는 실로 그 꽉꽉 막힌 지하철에 나를 가둘 용기가 없었다.


그나마 서울 근접권 중에서는 경기도 용인과 수원이 관심있었다. 그렇게 4시간을 운전해 용인으로 향했다. 날은 좋았고, 낯선 곳에 대한 설렘도 적당히 있었다. 경기도를 생각했던 건, 좋아하고 해보고 싶던 일들은 2,30대 때 실컷 했으니 40대엔 돈이나 많이 벌어볼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지역보다는 더 많은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한 번쯤 서울살이(경기도지만) 나쁘지 않지, 이런 마음 정도.


그러나 헛된 희망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제주에 살면 한 번씩 고층빌딩이 그리워질 때가 있었다. 서울에 출장 오거나 놀러 올 때면 '아 도시냄새~' 이러며 고개를 한껏 젖혀 고층 빌딩을 쳐다볼 만큼 나는 도시생활에 익숙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9년의 시간은 나를 참 많이도 변화시켰다.


'아니, 어떻게 도로에 나무가 이렇게나 없어? 와. 이거 지금 다 차라는 거지? 겨우 10km 오는데 지금 40분이 지났다는 거야?

오만군데서 들리던 빵빵 클락션 소리도, 지하철에 쏟아져 나오던 퇴근길의 표정 없는 사람들도, 늦은 시간 요란한 불빛들도, 좀처럼 적응이 안 됐다.

흡사 전쟁터였다. 아, 나는 그럼 다시 전쟁터로 들어가는 건가? 뭐 이런 복잡한 마음이 오갔다.


첫인상의 힘은 강렬했다. 며칠 경기도에서 묵으며 그래도 살고 싶은 지역을 가보고 부동산을 들락날락 거리며 그곳에서 일굴 미래를 상상해 봤다. 그리곤 자신이 없었다. 나는 표정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경기도는 실패. 뭐 새로운 곳이 있겠지. 작게  스멀스멀 올라오려던 불안을 미리 차단하고, 나는 새로운 곳으로 향했다.


이번엔 순천이다! 봄의 남도가 얼마나 이쁜지, 전라도 밥상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나는 밤새 이야기 할 수 있다. 나는 도심의 소음을 볼거리와 먹거리로 달래고 싶었다. 나도 안다. 나의 대책 없음을.


인구 30만이 안 되는 소도시 순천은, 적당한 번잡함과 사람들의 생기가 있었다. 생각보다 3,40대  인구비중이 높아 젊은 지역에 속했고 지역을 가로지르는 많은 하천들로 인해 도시가 건강하게 느껴졌다. 용인과 수원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도시라면, 순천은 뭐랄까, 일상이 있는 도시라는 인상이 느껴졌다.


도시를 가로지른 한천변으로 많은 이들이 걷고,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상이 도드라져 보였다. 도시는 깨끗했고, 사람들은 다정했다. 한 번쯤 살아봐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나 '여기서 뭐 먹고살지?'가 명쾌하게 해결되진 못했다. 그래도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곳이었다.


여행이 아니라 살아보고 싶은 지역을 찾아 떠난지라 새로운 것들이 보였다. 그 지역 안에서도 살고 싶은 동네를 찾아보고, 지역민들의 일상을 관찰하게 된다. 어느 시간대 어떤 사람들이 움직이는지, 사람들의 표정은 어떤지, 지역민 스스로 지역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하는지, 나는 열심히 보고 들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명쾌하게 그려지지 않아 나는 다른 도시로 몸을 움직였다. 어딜 가야 하나. 나는 지도를 펴놓고 인구 100만 이상의 도시를 검색했다. 고즈넉함과 여유로움을 사랑하긴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는 중요했다. 어느 정도 인구수가 담보된다면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공업도시는 어려울 거 같고, 아 여기는 좋긴 한데 젊은 층의 지역이탈이 너무 심각하다고 하니 여기도 안될 거 같고, 음, 여기??


그렇게 마주한 세 번째 도시는, 나에게 무색무취였다. 워낙 교통의 요지인 데다 우리나라 한가운데 있다 보니 전국 회의를 할때 몇 번 시청으로 회의하러 기차타고 온 것이 전부였다. 여행으로 온 적도 없고, 이곳에서 숙박을 한 적도 없었다. 이 도시는 나에게 '회의하던' 곳 중 하나일뿐.


그렇게 대전으로 갔다. 유성구IC를 통해 대전에 들어서자 입이 쩍- 벌어졌다. 와. 정말 빈틈없이 솟아오른 대단지 아파트에 한 번, 도로 양쪽으로 빡빡하게 심어진 가로수들에 한 번, 도심 한 복판으로 길게 몸을 누운 하천에 또 한 번 놀랐다.


어느 방향으로 돌아도 아파트단지 뷰인것도 놀라운데(도심이었다!), 도로변에 나무들이 울창한 느낌을 줄만큼 꽉곽 채워져 있어 묘하게 안정감을 줬다.


첫 인상은, 싱그로웠다.


인터넷에 대전을 검색해봤다. 성심당의 도시이고(역시나!), 노잼의 도시(아이고)이고, 많은 국가연구단지들이 밀집해있어 3,40대 젊은 층의 인구가 전국에서 가장 높은 젊은 도시였다. 내 눈길을 한 번에 사로잡았던 천변의 정체는 갑천이었고, 그곳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틀째 대전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그전날 성심당의 놀라운 줄에 질려버린 탓에(정말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틈이 없었다) 오늘은 대전의 새로움을 찾아나섰다. 두번째날의 발견은 자전거였다. 여기 사람들은 쉼없이 자전거를 탄다. 평지구나, 여기. 성별이나 연령에 상관없이 모두 자전거를 타고 있는게 놀라웠다. 자전거 타는 도시라, 그날 오후엔 궁금해서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숫자를 세봤다. 1시간만에 10명도 넘는 자전거 족을 만났다.


계획도시답게 도시는 깨끗하고 정갈했다. 도심 한복판에 천변이 흐르는 것도, 정말 큰 수목원이 지역민들에게 무료로 개방되고 있는 것도, 이렇게 학교가 많은 곳도 처음이었다. 대학교가 15개인가 했던 것도 놀라웠는데 내가 실제 체감한 것은 초, 중학교였다. 어느 지역을 가건 초중학교가 나왔다. 골목을 돌면 30km 경고가 나오는 놀라운 도시다. 은 가족이 주류인 도시라는게 실감이 됐다.


여기도 역시 원도심과 신도심간 격차가 심각하게 존재하긴 했다. 서구는 많은 행정기관이 밀집해있어 도심 그자체였고, 동구와 대덕구는 공실이 많이 보이고 걸어다니는 주민들의 연령대가 월등히 높았다. 립서점 수가 많아 전국 상위권에 속하고, 1인 가구수가 전국 1위 던가 그랬다. 젊은 이들이 이렇게 많은데 사람들은 이곳을 왜 노잼도시라 하나, 그들 관점에서 재미, 놀이가 부족해서인가? 유흥이 많이 없나? 빵에 진심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칼국수의 도시구나 여기. 재미는 도시이다.


3일째 되던 날, 이곳에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의 직감을 믿는다. 그렇게 나의 <집찾아 삼만리>는 약 3주만에 막을 내렸다. 그 사이 참으로 많은 지역들을 오갔다.

평소 좋아하고 여행을 가던 지역에 '살아보겠다'는 결심이 서지 않는 건, 여행과 일상은 다른 부분이라서 일게다. 여행지로 만난 지역은 꺼리가 풍성했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터전이 되는 지역은 좀 더 평온하길 바랬다. 대전이 그랬다. 도시가 젊고, 정갈했으며 일상을 누비던 사람들의 표정이 평화로워 좋았다.  


부동산중개인을 따라 몇 개의 집을 살펴보고, 내집이 될 곳을 발견했다. 계약서를 쓰는데 '아 이렇게 또 새로운 시작이구나' 싶어 낯설지만 설렌 마음이 들었고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았다.

 

대전과 관계맺기, 낯설지만 익숙하게

근 한달동안 열심히 발품을 팔아 <대전과 친해지기>에 돌입했다. 마음의 숨구멍 10개는 만들어놓고 싶어 매일매일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조금씩 익숙하게 만들어 갔다. 지역은 참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신기하고 놀라웠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잡지에 인터뷰를 하게 됐다. 아는 분 소개로 잡지사에 놀러갔는데,  가벼이 수다를 떨다 수첩을 꺼내오시더니 '어이하여, 대전에 오게됐는지?' 취재를 하셨다. 나는 주로 듣던 사람의 입장이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누군가에게 내 살아온 이야기를 쭉 털어놓는 일이 많지 않았다. 질문들이 오가고, 답변을 하면서 편집장님이 "잔다르크처럼 살아오셨네" 하셨다.


 제가요? 저는 누구보다 평범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웃고 말았지만, 집에 오면서 '잔다르크'를 검색해봤다. 내가 아는 잔다르크는 진취적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사람의 이미지였기에, 그사람과 내가 어떤 점이 닮았다는 걸까, 생각이 거기에 미쳤다.


생각해보면, 내 선택엔 늘 주저함은 없었다. 환경을 스스로 개척하는 편이기도 하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그 환경 안에서 내 숨구멍을 잘 마련해두는 편이다. 휘둘릴때도 있지만 단단한 심지를 갖고싶어 늘 중심에 나를 두고  생각하려 한다. 연고도 없는 곳에 집을 얻었다고 하면 다들 놀란다. 커리어를 어떻게 이어가려고, 그 아무도 모르는 곳에다 터를 잡느냐고 걱정이 섞인 타박을 하기도 하고, 그나이에 용기가 대단하다는 위로섞인 덕담도 한다.


늘 결과를 생각하고 움직이는 건 아니다. 이렇게 큰 결심일수록 심플하게, 납작하게 생각하려 한다. 나는 왜 이사를 하고 싶나, 어떤 곳에 살고 싶나, 최소한의 요건은 무엇인가, 첫 인상은 어떠한가, 그곳에 섞여 서 있는 내가 상상이 되는가.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결정하긴 했지만, 즉흥적인 선택은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달렸는데, 나라고 놀이처럼 결정한 건 아니니까. 그리고 일단 도시가 마음에 들었으니 1년이고 2년이고 살아보는 거지 뭐, 이렇게 시작하려고 한다.


생각은 가볍게, 몸도 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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