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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안후라이안 Jan 05. 2021

나는 가끔 나하고만 논다

다른 사람들이랑 더 잘 놀고 싶으니까

#1. 10년이 다 되어가는 일


그때 나와 막 인연이 되었던 그 사람은 밥 먹을 때마다 타박을 빼놓지 않았다. 이 음식은 이래서 맛이 없고, 저 음식은 저래서 간이 부족하고.... 나는 뭐든 그럭저럭 잘 먹는 시람이었건만, 옆에서 한참 불평을 늘어놓으면 입맛이 싹 가시곤 했다. 모래알을 씹는 기분이 되어 그릇이 채 비지도 않았는데 숟가락을 내려놓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매사에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인가 싶었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몸을 사리며 개복치처럼 굴던 나는, 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  열 번만 더 그러면, 여기에 또 다섯 번만 그러면....



작년 여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 식당에서 내준 디저트. 위 내용과는 관련 없음. (c) 2020. 아이후(ihoo) all rights reserved.



그날도 어김없었다. 입맛을 잃은 나는 맨입에 젓가락 끝을 살짝 물었다 내려놓았다. 내 속도 모르고 그는 천천히 오래도록 꼭꼭 씹으며 밥공기를 비워내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맛있네, 이것만 먹어.' 하며 반찬 한 가지를 소복이 쌓아준 내 앞접시를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개복치의 숫자를 추가하기에 오늘은 글렀다.

 

"우리 같이 밥 먹을 때마다 맛이 없다는 얘기 자주 하잖아. 왜 그러는지 물어봐도 돼? 나는 그거 듣고 나면 더 이상은 밥을 못 먹겠더라고. 나는 뭘 먹든 이렇게 우리 둘이 마주보고 함께 밥 먹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은데, 나만 그런 거야?"

그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입에 든 음식을 급하게 씹어 삼키고는 대답했다.

"아니, 그게, 내가 오자고 해서 온 곳인데, 예상했던 것만큼 맛있지 않으면 속상해서.... 같이 좋은 데서 맛있는 밥 먹고 싶었는데 맛이 없으니까 속상해서 그랬지. 미안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어디로 밥 먹으러 갈지, 그가 고민하고 찾아보는지도 몰랐으니까. 그냥 눈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자는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봐도, 이만큼 멋진 대답은 들을 수 없을 듯하다. 나는 그때 그에게 감췄던 서운함을 모두 털어낼 수 있었다.


잘 알고 있다고 믿고, 가까이 지내는 사람도 쉽게 오해할 수 있다. 편견 없이 물어보지 않는다면.




#2. 사오 년 전쯤으로 기억하는 일


그때 나는 중국 윈난성을 여행하고 있었다. 리장은 차마고도의 시작이고, 그만큼 차가 맛있기로 유명했다. 아, 여행 얘기를 하고 싶지만 꾹 참고, 사람 얘기부터.



밤에 더 아름다운 리장 올드타운. (c) 2017. 아이후(ihoo) all rights reserved.



"여기 사람들은 영어를 너무 못해. 대화가 안 되니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야."

우리는 소수족이 운영하는 숙소에 우연히 모여 저녁을 함께 먹곤 했다. 이건 미국인 친구의 말이었다. 이 숙소로 오기 전에 묵었던 호텔에서도 미국인 투숙객 한 사람이 비슷한 불평을 하는 걸 들었기에, 여기에 은근한 반감을 갖고 있던 터였다. 마음 같아선, '그래, 넌 영어 말고 쓸 수 있는 다른 언어라도 있니?'라며 쏘아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난 오히려 우리 두 사람이 영어로 대화하면서 서로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할 거라고 미리 가정해두는 게 꽤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 내가 만약 한국인과 한국어로 대화한다고 해도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할 거거든. 그런데 같은 언어를 쓴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 말을 전부 다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잖아. 모국어가 다른 우리 두 사람은 각자의 나라에서보다 훨씬 더 대화에 조심스러울 테고, 오히려 그래서 각자가 전하려 했던 진짜 뜻을 제대로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와, 이걸 내가 현지 맥주 두 병(335ml짜리)을 마시고 영어로 할 수 있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어쨌든 이런 얘기를 하려고 애썼다. 그 친구는 어깨만 으쓱했지만(친구, 유네스코에 취직하고 싶다며!).




#3. 불과 몇 달밖에 안 된 일


"아이후는 이런 사람이잖아."

"아이후답지 않게 왜 그래?"

"아이후는 이런 행동을 자주 하고, 이런 행동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사람일 게 뻔해."


이번 겨울에 들어서면서부터였을까?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피곤해졌다. 글을 쓰겠답시고 비워둔 시간에는 스스로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된다. 내가 모르는 나를 발견하거나, 내가 아는 내가 낯설어지기도 한다. 스스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기에는 괴로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이런 와중에 내 속에 단팥이 들었는지, 슈크림이 들었는지에 대해서 곁눈질로만 판단하고는 냉큼 나를 붕어빵이라고 단정 짓는 이들을 이상하리만큼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럴 때면 아니라고 얘기하기도 하고, 대답하는 대신 피하기도 했다. 지나고 나니,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으면 좋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내 배를 가르고 씹어보라고, 친구. 나는 풀빵이야! 속은 단팥 반 슈크림 반이야. 비율은 아직 나도 확인 못 해봤어. 내일은 잉어빵일 수도 있지만, 그건 내일 일이라 단정하긴 아직 일러.'



누군가와의 어떤 관계로 맺어진 나는, 그 사람의 크고 작은 영향력으로 다듬어지는 듯하다. 적어도 그 사람과 있을 때는. 때로는 이 모든 관계들이 부담스럽고 불편하다. 나는 매 초마다 조금씩 방향을 바꾸는데, 아무도 그것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한 기분.


여행을 갈 수 있다면,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들과 즐겁기만 한 잠깐의 동행을 기껍게 즐길 수 있을 텐데. 어떤 사람과도 관계를 맺지 않은 본연의 나, 나를 잘 안다는 사람들로부터 상처받을 것에 주저하며 몸 사리지 않는 나, 누군가의 기대치에 닿으려 애쓰지 않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나. 나를 잘 모른다고 쉽게 인정하는 사람들 속에서 내 몸에 새겨진 오직 나만 아는 나 스스로인 내가 되어....


꼬박 1년이 넘어갈 때까지도 이런 휴식을 얻지 못했다(코로나19란?). 뾰족한 수가 없어, 나는 한동안 나하고만 놀았다. 내가 나일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더니, 이제 다른 사람들이랑 더 잘 놀 수도 있을 것만 같다. 나와 눈 맞추고 오랫동안 서로를 천천히 눈여겨봐줄, 여유 있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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