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신구간

나만 아는 감정 버리기

by 무쌍

주엔 곧 신구간이 시작된다. 절기 대한(大寒) 후 5일째부터 입춘(立春) 전 3일까지 신구간이라고 한다. 인간사를 관장하던 신들이 한 해 동안 지상에서 임무를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고하고 새로운 임무를 맡는 기간이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동티 나지 않게 이사를 가는데 오래된 전통이다.


신구간이 아니면 '동티'난다는 속설은 육지 식의 '손 없는 날'보다 더 강력한 듯 제주섬에선 진풍경이 벌어진다. 섬 전체가 어수선해며 한꺼번에 우르르 정신없지만, 신구간이 끝나면 한꺼번에 고요해진다.

신구간엔 사도 하지만 집수리나 미루던 안 공사도 한다. 게다가 동티 날까 함부로 버리지 못한 물건들도 내놓을 수 있는 날이다. 지 감귤 수확이 끝난 제주 귤밭도 새 농사를 준비하기에 알맞은 시기가 된다.

요즘은 예전에 비해 인구도 많고 사정이 달라져서, 옛말 인지도 모르지만 제주인들은 여전히 신구간을 지킨다.


제주에서 지낸 날 보다 타지에서 지낸 지 오래되었지만, 나는 아직 사투리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할머니와 살면서 배운 사투리는 뼛속 깊이 새겨져 있는 듯 사투리엔 자동 응답된다. 주섬에 살지 않지만 신구간에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신들이 모두 하늘로 올라간 사이에 골치 아프고 손도 대기 싫고, 꺼림칙해 미룬 것을 버릴 참이. 몸은 섬을 떠나왔지만, 내 삶도 신구의 전환기가 찾아와 마음의 변화를 피할 수 없을 듯하다. 남몰래 숨겨왔던 나만 아는 상처들을 떠나보내려고 신구간을 기다리고 있다.


다리던 택배가 아닌 귤 박스 하나가 현관문 앞에 놓여 있었다. 보낸 사람을 확인하는 순간 번개가 내칠 거라며 번쩍하더니, 쿵쿵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맑은 하늘을 흔들었다. 목 부근이 지더니, 죄책감을 불러와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고 압력을 넣었다.

그 박스 안엔 귤만 있지 않다. 원인도 모르는 공허함 있고, 서러움을 느끼게 하며, 깊은 분노가 들어 있다. 똑같은 유령이 귤과 함께 따라 나오는데, 항상 같은 지점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복잡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나타나, 내가 태어날 이유가 있는지 알 수 없게 해 집어 놓았다.


난 생일날이 뭔지 몰랐다. 우리 가족에겐 아무 날도 아니었다. 생일 선물을 받고 즐거워하는 아이가 나오는 드라마를 다 같이 보면서도 "생일이 무슨 별 날이야?"라는 말을 들었다. 생일은 비밀이었고, 친구의 생일날 초대받았지만 가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내 삶을 털어놓지 않으면 숨길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자, 내게 효도라는 명목으로 생일날을 중요한 날로 바꾸더니 케이크를 사 오게 하고 선물이나 용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머릿속에선 복잡한 인지부조화가 일어났다. 랫동안 가 믿어야 했던 아무것도 아닌 생일날이 실제로 맞다고 하는 것이다. 겨우 서러움을 참아 넘겼는데, 인을 의식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해야 했다. '생일 상을 받고 자란 다른 자식들처럼 효도를 위한 생신상을 차리고 용돈과 선물을 준비해야 해.' 그런 생각 자체가 서러웠다.


내 기억에는 차갑고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누군가가 있다. 나를 보는 모든 표정과 말투는 늘 읽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나를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로 몰아넣었다. 또 느닷없이 쳐들어온 택배 상자는 내 발을 걸어 한순간에 넘어지게 했다. 잊고 있던 트라우마는 택배 상자로 둔갑해 내 앞에 나타났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에게 단 한 번도 충족되지 못했던 인정 욕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양육자가 되면서 완전히 각성하게 되었다.


세상 이치에 맞지 않는 말도 안 되는 갖가지 엉터리 논리를 강요당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스스로 살길을 마련해놓자 '남들처럼', '화목한', '가족여행을 다니는'라는 수식어를 달고, 그런 삶이 진짜라고 나에게 자식 노릇을 하라며 수시로 주입시켰다. 상실로 가득 차 있는 내 삶을 완전히 거짓으로 포장을 해야 했다. 그런 이유로 이번 자기 합리화는 쉽지 않았다.

하기 싫었다. 꾹꾹 참았던 긴 여정을 끝내려고 딱 눌어붙은 스티커를 떼어내듯 조금씩 천천히 움직였다.

그 후부터 내 생일은 특별한 날이 되었다. 생일날은 남편과 아이들이 축하해주는 생일 파티를 하고, 하루나 이틀 전에 생일 휴가를 즐긴다. 나만을 위한 특별한 시간을 나 자신에게 선물해준다. 그리고 생일날처럼 잘못 쓰인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씩 새롭게 바꿔야 했다. 심리진단검사 결과에도 내 원초적 욕구들은 전혀 채워져 있지 않았다. 내 욕구들은 이미 버려졌지만, 내 감정을 표현하고 느끼는 법을 새로 배우고 있다. 상담가가 말한 대로 10년쯤 지나면 치유가 어느 정도 될 거란 희망의 시간이 언젠가 채워질 거라고 믿는다.


운 좋게 나는 결혼하면서 내 마음대로 살기 시작했고, 나도 모르게 치료가 되고 있었다. 웬만해선 화를 잘 내지 않는 다정한 남편과 밝은 아이들의 웃는 얼굴 덕분이었다. 감정을 쓰다가 보니 이미 나는 치유가 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트라우마는 잠깐씩 날 놀라게 하긴 하지만 말이다.

신구간이 지나도 내 상처는 흉터가 남고 깨끗한 완치는 안될 것이다. 슬픔과 상처가 무섭지만 이젠 더 중요한 것이 뭔지 알듯도 하다. 소중한 내 삶이 용기 내어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가지치기가 된 나무에서 새 가지가 자라 잎이 돋고 꽃이 피는 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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